오병환의 백과사전

 

대회 개최 경위 및 준비상황

대한탁구협회는 1980년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4일간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하는 제1회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를 위해 거국적인 준비에 들어갔다.

최원석 회장이 복귀한 이후 처음으로 전개한 큰 사업이었던 동 대회는 아시아 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국제오픈대회라는 중요한 의미가 있는 행사였다. 그 때문인지 동 대회에는 전체 36개국에서 340여 명의 대규모 선수단이 참가의사를 전해옴으로써 질과 양 모든 면에서 세계선수권대회에 버금가는 규모를 자랑하게 되었다.

탁구는 1973년 사라예보 제32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국내 구기종목 중 사상 처음으로 세계를 제패하여 국내외에 그 위치를 확고히 했다. 그러나 평양에서 열린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한국은 그동안 수차례 기록했듯이 참가를 하지 못했다. 북한은 국제탁구연맹(ITTF) 회원국인 한국의 참가를 끝내 저지하면서 한국 탁구의 고립화를 시도하고, 아울러 왜곡된 선전을 일삼았다.

그 같은 당시 상황은 우리 한국 탁구계도 국가적 차원에서의 스포츠 외교가 절실했음을 잘 보여준다. 대한탁구협회는 우방은 물론 공산권 및 비동맹 국가에 대한 북한 측의 선전공세에 대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시아탁구연합(ATTU) 가입과 80년대 안에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하기 위한 전초작업, 그리고 한국탁구의 경기력 향상 준비작업 등을 그 목적으로 내세웠던 서울오픈은 그 같은 시대상황도 중요한 배경이었다.

실제로 대한탁구협회는 국제탁구연맹 로이 에반스 회장 부처를 비롯한 20여 명의 국제 탁구계 저명인사를 특별 초청하는 등 그 동안의 수동적 방문외교를 넘어서 능동적 초청외교 시대를 열어나갔다. 서울오픈이 당초 예상보다 12개국이나 많은 36개국의 참가로 오픈대회 사상 최대 규모를 자랑하게 된 것은 그 같은 적극성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게다가 중국이 주도한 월드컵탁구대회가 거의 같은 시기인 8월 28일부터 31일까지 홍콩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것을 감안할 때 다수의 ATTU 회원국들이 서울오픈을 선택하게 한 것은 외교적인 큰 성과였다.
 

▲ 제1회 서울오픈국제탁구선수권대회 조직위원회 사무실 현판식 모습. 우로부터 최원석 회장, 조상호 체육회 부회장, 조용시 탁협 부회장.

서울오픈대회는 우승팀(선수)을 비롯 입상팀(선수)에 총 1만달러(6백만원)의 상금을 지급키로 했으며, 당시 협회는 중국, 북한, 일본을 포함한 국제탁구연맹 회원국 122개국에 6월초에 이미 정식 초청장을 발송한 바 있다. 또한 그동안 한상국, 김경태 두 부회장과 박성인 경기이사를 유럽, 미주 및 동남아시아 지역으로 파견, 공산권과의 교류를 위한 다각적인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공산권 국가들은 결국 불참했으며 특히 중국과 일본도 불참했다.

하지만 대회개최에 따른 세계 탁구계의 반응은 상당히 호의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ATTU 관계로 소원한 상태에 있던 일본도 한국과의 공식 대화 창구가 마련되면서 상호 이해 증진에 나서고 있었다. 공산권과 비동맹 국가들에게도 서울오픈 개최와 그에 따른 외교활동은 한국탁구의 입장에 매우 호의적인 변화를 가져다 준 효과를 거두었다.

무엇보다도 서울오픈대회는 평양 세계대회에 참가했던 많은 서방국가가 참가를 저지당했던 한국의 입장을 이해하는 직접적인 계기였다. 남북한간 비교의식이 높아져 한국의 현실을 직접 보고 국력 우위를 실감케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당시 대회의 의의는 한층 부각되고 있었다.

협회는 동 대회 준비를 위해 1980년 6월 17일 대회조직위원회를 구성하고 대한체육회(무교동 8층)에 별도의 조직위원회 사무실을 개설, 현판식을 갖고 준비해 왔다.
 

◯ 조직위원회 명단
위 원 장 : 최원석(협회장)
부위원장 : 김경태, 한상국, 조용시(협회 부회장)
사무총장 : 김경태(동 부회장)
위원장보좌 : 김광희, 이종훈, 박노수(동아그룹)
총무위원장 : 이종춘(협회 총무이사)
경기위원장 : 박성인(협회 경기이사)
운영위원장 : 김영식(협회 기획이사)
관리위원자 : 백송빈(협회 이사)

8월 11일부터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개최한 문교부장관기 쟁탈 제13회 학생종별탁구대회는 서울오픈대회 리허설을 겸해서 치렀다. 15대의 탁구대를 설치, 오픈대회 경기진행을 예행 연습한 것이다. 조직위원회에 동원된 행정요원만도 45명, 공개행상 안내원 등을 합치면 3천여 명을 헤아렸다. 참가국 수가 늘어남에 따라 조직위는 예산도 당초보다 1억 원이 많은 4억 5천여 만원으로 재편성하고 일정에서부터 공개행사 리셉션에 이르기까지 준비 작업을 세밀하게 추진했다.

 

대표선수 훈련 및 입상전망

▲ 당시 신문에 실렸던 제1회 서울오픈대회 포스터.

아시아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열리는 제1회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둔 남녀 국가대표 선수들의 표정에는 비장한 임전태세가 역력했다.

경기도 용인군 기흥면 고매리 475번지에 자리한 국가대표 탁구선수 훈련원. 2개월 전 체육관 개관식과 아울러 입소한 대표선수단이 막바지 훈련을 쌓고 있는 땀의 현장은 달아오르고 있었다. 대표선수들은 평양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때의 입북 거부로 겪은 쓰라림을 잊은지 이미 오래였다. 대표선수단에서는 이제 사라예보의 영광을 되찾자는 것만이 유일한 꿈이었다. 그래서 세계정상을 향한 집념은 더욱 더욱 불타오르고 있었다.

세계정상 재탈환의 집념을 불태우는 한국탁구는 우선 유럽의 파워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 지도자들의 견해였다. 기교를 앞세운 한국탁구와 파워를 바탕으로 한 정통의 유럽탁구가 정면으로 부딪치는 시험무대가 된다는 데서 서울오픈은 기술적 측면으로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었다.

대회 개최 10일 전, 한국대표팀은 만반의 준비를 완료하고 그동안 합숙 강화훈련으로 다듬어 온 비장의 무기를 점검했다. 한국 팀은 홈그라운드의 이점을 안고 있는 만큼 실수 없이 잘 싸워야 한다는 부담을 안고 있었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의 목표는 7개 종목 중 여자단체 우승, 남자단체 준우승과 개인전에서 2~3개 종목을 우승하는 것으로 삼고 있었다.

박성인 총감독은 서울오픈대회야말로 한국탁구 중흥의 불길을 일으키는 출발점이 될 뿐만 아니라 가까이는 스칸디나비아 오픈대회와 익년 유고 노비사드 세계선수권대회, 그리고 멀게는 83년 도쿄 세계선수권대회까지도 내다 볼 수 있는 전력정비의 시험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 한국 선수단 명단
남자A팀 : 김완, 유시흥, 유경석, 한춘택
남자B팀 : 이상국, 오병만, 김기택
남자C팀 : 손성순, 신동현, 지용옥, 조동원
여자A팀 : 이수장, 김경자, 신득화, 양영자
여자B팀 : 신경숙, 안해숙, 박홍자, 황남숙

◯ 개인전 13명 추가 참가
협회는 국가상비군 선수 18명(남자 10, 여자 8) 외에 각 실업팀 선수와 학생선수 13명을 국제경기 경험 축적을 위해 개인전(단식, 복식, 혼합복식)에 출전시키기로 했다. 이들은 각 여자실업팀 대표 5명과 학생종별대회에서 상위 입상한 선수 8명으로 추가 선발했다.

- 실업선수 : 성낙소(외환은행), 조월연(산업은행), 나미희(대한항공)
             박희숙(한일은행), 김현옥(부산코카콜라)

- 학생선수 : 최완규(숭전대), 이광득(부산금성고), 윤석노(군산상고),
             안재형(부산남중), 김정자(한성여대), 윤경미(서울여상),
             백양미(서울여상), 김영미(문영여중)

 

서울오픈대회 앞두고 최원석 회장 기자회견

▲ 서울오픈대회 개최에 관한 기자회견을 하던 당시의 최원석 회장.

5억 원을 들여 개최하는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 준비를 진두지휘하던 최원석(조직위원장) 회장은 우선 5대양 6대주 전 세계에서 36개국 이상의 많은 나라가 참가하기로 한데 대한 만족을 표시하고 있었다. 그는 “탁구선수 출신 회장으로 오래 전부터 국제대회를 만들어 싶었는데 막상 시작하니까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그간의 고층을 털어놓았다.

대회 개최를 10일 앞두고 동아건설 강당에서 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최원석 회장은 또한 “오는 26일부터 잠실 종합체육관에서 나흘 동안 개최되는 서울오픈이 이미 기술에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있지만 탁구 외교에서는 고립된 한국 탁구에 활로를 열어주는 일대 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되고, 더 나아가서는 비동맥국과의 외교와 국력 과시의 무대로서도 중요한 뜻을 가지고 있다.”고 전 언론사 관계 기자단 및 카메라맨들 앞에서 밝혔다.
당시 신문에 보도된 기자회견 내용을 정리한다.


▷ 서울오픈국제탁구대회 창설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 이미 오래 전부터 생각해왔던 꿈이었다. 1976년 서독오픈, 1977년 버밍엄 세계선수권대회 단장으로 참가했었다. 서독오픈에서는 이에리사 선수가 중국의 장립 선수를 꺾고 우승했는데, 이런 광경을 탁구를 사랑하는 국내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지난해 여름 다시 탁구협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꼭 국제대회를 만들겠다고 결심했다.

▷ 서울오픈은 세계선수권대회 유치 전초전이라고 하는데?

▶ 말이 났으니 말이지 79년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할 계획이었는데 북한이 선수를 쳤다. 83년 대회는 벌써 일본 도쿄로 결정되어 있으니 85년 제38회 세계선수권대회 유치를 위해 준비하고 있다. 현재 한국, 스웨덴, 인도가 유치를 희망하고 있는데 이번 대회에 양국 회장을 초청, 양해를 구할 작정이다. 우리가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하면 중국도 오지 않겠는가.

▷ 이번 대회를 만들면서 특별히 어려웠던 점은?

▶ 북한의 방해공작으로 애를 많이 먹었다. 이번 서울에 오는 대부분의 나라가 79년 평양세계대회에 참가했던 팀들이라 자연히 비교가 될 것이다. 이 방해 속에서도 많은 나라가 참가할 수 있는 것은 해외공관의 도움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정에 없었던 첫 번째 대회라 팀을 유치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한상국, 김경태 구 부회장이 세 차례나 각국을 돌며 애썼다. 특히 한상국 부회장은 이번 대회에 36개국이라는 오픈대회 사상 가장 많은 국가를 참가시키기 위해 64일 동안 3차례에 걸쳐 지구를 두 바퀴나 돌았다. 서울오픈의 성공은 이 끈질긴 외교의 성과라고 말할 수 있다.

▷ 서울오픈대회는 계속해 나갈 것인지?

▶ 물론이다. 아시아 특히 극동(한국, 중국, 일본, 북한)이 기술면에서 정상에 있지만 탁구활동의 중심무대는 유럽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시아가 인접국끼리 교류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이 하루 빨리 오픈대회를 창설, 서울오픈과 10일 사이 정도의 간격을 두고 개최한다면 이 극동서키트는 수준 높은 멋진 대회가 되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바라보고 만든 대회라고 보면 되겠다.

▷ 세계탁구계의 귀빈들이 대거 서울에 온다는데?

▶ 서울오픈의 또 하나의 목적은 탁구외교의 고립에서 벗어나자는 것이다. 국제탁구연맹 로이 에반스 회장 등 세계 각 국 탁구협회 회장과 아시아 탁구연합 집행위원 다수가 포함되어 있다. 중국, 일본과 동구권은 여전히 외면하고 있지만 계속 두드리면 언젠가는 열리지 않겠는가.

▷ 이번 대회의 외교적인 성과에 대해?

▶ 한국탁구는 세계를 제패한 당당한 실력을 갖고 있는 나라다. 이번 대회 개최를 통해 세계 탁구무대에서 한국탁구의 지위를 선양하고 대회 기간 동안 적극적인 외교활동의 전개로 참가국과의 선린관계를 더욱 강화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특히 참가국 다수가 지난해 평양 세계대회에 참가했던 나라들이어서 자유로이 보고 듣는 가운데 한국에 대한 올바를 평가를 내릴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이 대회를 통해 한국탁구가 결코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과시하고 싶다.

▷ 우리 선수들의 전략에 대한 기대는?

▶ 이에리사, 정현숙 선수 은퇴 이후에도 우리 탁구계는 새로운 우수 선수들을 많이 발굴해냈다. 국제경기 경험이 부족한 이들에게 이 대회가 큰 도움이 될 것이며 언젠가 또다시 세계제패가 가능하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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