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저력 한국 떨친 스포츠 외교의 개가

한국탁구가 심혈을 기울여 창설한 제1회 서울오픈 국제탁구선수권대회(80. 8. 26 ~ 29)는 한국의 저력을 재확인한 잔치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외교적인 외로움을 어느 정도 씻을 수 있었고 미래의 세계선수권대회를 훌륭히 치러낼 수 있다는 조직능력을 보여주었다.

경기는 예상대로 한국의 독무대였다. 세계 정상의 중국을 비롯한 일본과 동구 강호들이 불참, 세계수준과의 엄밀한 평가를 할 수 없었던 것이 아쉬웠지만 한국 탁구는 역시 무한한 가능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해준 대회였다.

한국 A.B팀이 패권을 다툰 여자단체전은 물론 개인전에서도 한국의 3종목의 4강을 독점하는 등 한국 선수들이 시상대에 오르지 않을 때가 없었다. 여자부 경기가 싱겁게 되고 수준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반면 남자부는 박진감 넘치는 열전으로 갈채를 모았다. 특히 복식 결승, 단식 준준결승까지 오른 한국 남자의 분전은 미래의 세계도전의 희망을 비쳐주었다.

아시아에서는 처음 열린 국제오픈경기인 당시 대회의 참가국은 총 35개국이었다. 아시아탁구연합(ATTU) 회원국으로 계속 한국과의 교류를 기피해온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도 선수단을 보내왔다. 많은 참가선수들이 전해 정치적인 대회라는 비난을 모았던 평양 세계선수권대회에도 출전한 바 있어 한반도 남과 북의 다른 점이 무엇인지 체험을 통해 깨달았다는 점에서 더욱 대회의 의의가 깊었다.

스웨덴의 요한슨 코치는 이 점에 대해 “정치적인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두 곳의 모든 점은 다 좋았다. 그러나 나는 서울에서 더 머물고 싶다.”고 상징적으로 표현해 눈길을 모으기도 했다. 아무튼 당시 서울오픈탁구대회는 전해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 개최에 이어 한국을 세계에 알리고 한국 스포츠의 능력을 보여준 기회였다.

대회 운영에서는 국제대회 주최 경험이 없어 약간의 혼란이 있었으나 로이 에반스 회장을 비롯한 국제 탁구계 인사들은 예상 밖의 훌륭한 대회였다고 칭찬했으며, 세계선수권대회를 개최할 수 있는 시설과 조직력을 갖추었다고 평했다.

그러나 느림보 대회운영은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이러한 지연은 국내선수들 때문에 빚어지는 수가 많았다. 프랑스와 한국이 만난 남자복식 결승 경기에서 한국 선수들은 한 포인트가 끝날 때마다 땀을 닦는 등 오랜 시간을 끌어 관중들의 빈축을 받은 바도 있다.

 

차후 세계대회 기초자료 획득 큰 성과

경기는 예상대로 여자-한국, 남자-유럽의 우세로 나타났다. 한국 여자는 단체전과 개인단식, 복식을 휩쓸었으며, 남자부에서는 스웨덴이 단체전, 프랑스가 개인 단.복식 패권을 나누어 가져갔다. 개인으로서는 여자복식과 혼합복식에서 우승한 여고생 황남숙과 남자 단.복식을 석권한 탁구쇼의 주인공 세크래탱이 단연 빛났다.

특히 세크래탱은 탁구의 진미를 보여주는 묘기와 단식에서의 저력과시로 당시 대회의 최고 인기스타로 떠올랐다. 한국여자 A.B팀은 우승과 준우승을 나누어 갖고 개인전 준준결승부터 독무대를 이루어 자체 내 평가전 같은 인상을 주었지만 경기내용의 빈약, 관중들로부터 외면당했다. 1973년도 세계제패 당시 정현숙, 이에리사의 플레이와 비교해보면 아직도 큰 차이가 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81년 노비사드(유고), 83년 도쿄(일본)의 대회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실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의 공격과 수비의 양 기둥 이수자와 김경자를 꺾은 새 스타 황남숙 선수의 출현은 반가운 현상이었다. 이 부분은 또한 한국 여자탁구의 주전 국가대표와 2진 여고생의 차이가 뚜렷하지 않고 톱클래스 선수들의 완전하지 못한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특히 이수자는 유럽선수와의 대전에서 허점을 나타내고 국내선수에게도 자주 무릎을 꿇었다. 따라서 황남숙의 등장은 기존 대표선수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미래의 경쟁적인 발전이 있을 것으로 전문가들의 기대를 부풀렸다. 한국 남자팀은 비록 복식 준우승이 가장 좋은 성적이었지만 고교생 김기택이 스웨덴이 장차 세계 챔피언감으로 키우고 있는 에펠그린을 준준결승전에서 3대 2로 격파하고 김완이 역시 스웨덴의 신인 칼슨을 3대 0으로 꺾는 예상밖의 성적을 거두었다.

힘과 기술에서 유럽에 안된다는 깊은 콤플렉스에 빠진 남자 탁구는 경기를 할수록 유럽선수들과 접근전을 벌여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한국 여자팀은 적어도 세계 중위권의 실력을 가진 나라들은 우리의 적수가 될 수 없으며 역시 상대는 중국, 북한, 일본뿐이라는 사실을 다시 입증한 결과였다.

▲ 서울오픈을 통해 한국탁구의 간판스타로 등극한 황남숙. 사진은 당시 스포츠 잡지에 대서특필됐던 황남숙의 경기모습이다. 황남숙은 당시 성수여상 3학년 재학생이었다. 

남자는 물론 유럽세가 판을 쳤으면 이것은 예상했던 사실이었다. 서울오픈대회가 맺은 결실중의 하나가 바로 파워의 탁구가 무엇인가를 실제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유럽탁구의 파워는 실로 대단한 것이어서 기교의 탁구만으로는 정상은커녕 중위권에도 이르기 어렵다는 것을 산 교훈으로 실증해준 것이다.

한국 탁구는 특히 남자의 경우 파워에서 현저한 열세에 놓여있음이 한눈에 드러났다. 그러나 한국 남자선수들은 유시흥, 김완, 김기택 등이 한국적 탁구의 특성을 살려 최대한으로 선전 분투함으로써 미래를 밝게 했다. 한국은 물론 중국, 유럽세도 세대교체 단계에 있어 그 당시를 출발점으로 잡는다면 한국탁구의 가능성도 한층 높아질 것으로 탁구전문가들은 전망했다. 문제는 한국탁구가 힘을 배양하고 여기에 세기를 가미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대회를 위해 한국은 새로이 마련된 기흥훈련원에서 2개월간의 합숙 강화훈련을 가졌으며 힘의 열세를 커버하기 위한 선제공격의 무기를 개발했다. 실전에서도 선제의 효과가 그대로 드러나 남자의 경우 우승은 못했지만 3위의 자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서울오픈을 통해 한국탁구는 81년 노비사드 세계선수권대호, 나아가서는 83년 도쿄 선수권대회에 대처할 기초자료를 얻어내는 큰 소득을 얻었다.

 

한국탁구 중흥의 소중한 밑거름

한바탕 탁구 열기가 휩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곳에는 여기 저기 알찬 결실들이 떨어져 있었다. 동 대회 개최는 한국 탁구의 진로를 한층 명료하게 해준 전환점이었다. 탁구경기가 펼쳐지는 현장, 도대체 어떠한 정열이 그 많은 사람들을 몰려들게 만들어 두 눈을 활짝 뜨게 하고 또 매료케 했는지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탁구는 그 시점부터 보는 스포츠로서의 위치를 재정립하게 되었고, 세계정상탈환의 목표기간도 앞당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

2만여 관중을 수용하는 잠실종합체육관이 관중들로 꽉 메어졌다. 탁구에 이렇게 관심이 높을 줄은 관계자들도 미처 몰랐었다. 테니스를 보는 맛이 아기자기하다면 탁구는 이보다 한술을 더 뜬다. 대회는 탁구의 참맛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며 열전 4일 동안 관중들을 끊임없는 감동 속에 빠뜨렸다. 다양한 입장식 프로그램, 특히 세크래탱의 탁구쇼는 묘기의 경기를 넘어서서 완벽히 꾸며진 코미디극의 정수였다. 뿐만 아니라 세크래탱은 격렬한 메인게임을 통해 쇼에 울고 웃던 관중들을 다시 한 번 숙연한 승부의 세계로 끌어들였다.

서울오픈대회는 당시 한국 탁구의 기술적 위치를 점검하고 한국 탁구의 저변확대를 위한 탁구붐을 조성시키는 꽃씨를 심는 외에 스포츠 외교를 통한 국력의 과시를 노린 다목적 핑퐁 페스티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당시 서울오픈대회에서는 일찍이 유례없이 3국의 텔레비전은 물론 각 일간지의 톱기사로 중계해 지방 구석구석까지 탁구의 열기를 파급시켰고 경기장 주변은 온통 축제분위기로 들떴었다. 이것 또한 한국 탁구 중흥의 밑거름으로써 탐스러운 꽃을 기대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세계를 제패하고 이처럼 엄청난 축제를 마련하게 되기까지 한국 탁구는 괄목할만한 페이스로 전진을 계속해왔다. 한마디로 제1회 서울오픈대회는 전 세계에서 몰려온 350여명 탁구인들 앞에서 탁구정상국의 면모를 과시하는데 조금은 모자람이 없었던 성공한 대회였다.

 

국제탁구연맹 로이 에반스 회장

서울오픈대회에 특별히 초청된 국제탁구연맹의 로이 에반스 회장 부부는 서울에서의 대회 기간 중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콧대 높은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찾아가게 된 것도 모두 다 백구의 마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은 말로 동 대회를 참관한 소감을 전했다.

“이번 대회 오프닝 세레머니(개회식)가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한국의 전통문화를 한눈에 볼 수 있었던 클래식 댄스는 참으로 훌륭했습니다. 탁구인들은 경기하기에 너무 바빠서 외국의 문화나 습성을 배우기가 힘든데 서울대회의 개회식 공개행사로 마련됐던 꽃부채 춤이나 구수한 농악대의 출연은 한국의 맛을 드뿍 안겨주었습니다. 나는 민속 군무를 보고 참된 한국의 문화를 알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국제대회에 두루 참석했지만 이번 대회처럼 스포츠행사 뿐만 아니라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한 공개행사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 로이 에반스 국제탁구연맹 회장은 당시 아시아에서 고립상태에 있던 한국 탁구계로서는 묘한 감정이 섞일 수밖에 없는 입장에 있었다. 사진은 제2회 서울오픈 때 다시 한국을 방문한 그와 함께 했을 때의 모습이다. 맨 왼쪽 필자로부터 김경준 이사, 로이 에반스 회장, 김영식 이사.

색깔의 아름다움과 그 아름다움에 어울리는 가락은 에반스 회장뿐만 아니라 350여명의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사실 에반스 회장을 보는 우리들의 입장은 조금은 야릇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한국의 탁구, 특히 여자부는 세계의 톱클래스이며 이처럼 성대한 페스티벌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도 여전히 아시아 탁구계에서 고립을 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한국이 ITTF(국제탁구연맹) 회원국이면서 아시아 각국이 가입되어 있는 아시아존의 ATTU(아시아탁구연합)에 가입 못하는 것이 에반스 회장만의 책임만은 물론 아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이를 따져 묻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던 것이다. 1978년 이어 두 번째로 한국에 온 에반스 회장은 “평양 세계대회 때 한국과 이스라엘이 참가 못한 것을 무척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고 밝히고 “최선을 다했지만 나의 결정 밖의 요인에 의해 제외된 것은 커다란 유감이었다.”고 자책했다.

서울오픈대회를 직접 보고 한국 탁구인들의 행정력과 조직력에 감탄했다고 밝힌 그는 또한 “한국이 머지않은 장래에 세계선수권대회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81년 노비사드에서 열리는 ITTF 총회 때까지 대회개최 신청서를 제출해야 한다.”고 전했다.

에반스 회장은 그 당시 “세계선수권대회는 81년 유고, 83년 일본까지는 결정됐고 85년 인도와 87년에 칠레가 유치를 희망하고는 있지만 대한탁구협회의 노력에 따라 85년의 대회도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낙관했다. 당시 그는 70세의 고령이었지만 젊은 사람 못지않게 좋은 혈색을 가진 거구의 풍채를 지니고 있었다. 에반스 회장은 조심스런 말 속에서 회장으로서 자기 직분의 한계를 차근차근 풀어나갔다. 워낙 과묵하고 남들의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절대 안한다는 에반스 회장의 깊은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서울의 밤에 비해 평양의 밤이 너무 어두웠던지, 아니면 국제탁구연맹 회장 자리에 앉은 탓인지 그의 남북비교는 무척 신중했다.

ITTF 회장으로서 아시아탁구연합에 한국을 밀어 주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것 같지 않지만 그는 스스로를 ‘제각기의 조직이 갖고 있는 원칙을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나의 할 일은 많은 대회에 보다 많은 나라를 참가시키고 또 대회를 계속 존속시켜 나가는 일”이라고 말했다.

여자단체전에서 최초의 세계제패라는 승전고를 올렸던 한국이 아시아의 외톨박이가 된 것은 중국의 엄청난 정치적 횡포 때문이었다. 대회 이틀전인 9월 24일 한국에 온 그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한국이 국제연맹의 정회국 임에도 불구하고 아시아연합의 멤버에서 제외되어 섭섭하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그때마다 “ATTU 가입을 위해 애썼지만 정치적 문제로 가입이 실현되지 못했으나 계속 노력하겠다.”고 강조했음을 새삼 상기시키기도 했다.

1967년 스톡홀롬에서 열렸던 세계선수권대회 때부터 회장직을 맡아 온 에반스는 영국태생으로 30~40년대의 영국 핑퐁계를 주름잡았던 챔피언 출신이다. 그의 부인도 이때 여자부의 챔피언이었다. 딸과 외손자 셋을 거느린 에반스는 1998년 5월, 88세를 일기로 작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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