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10) / 전대호

누구나 복기하면서 산다
  바둑에서 승부가 끝나면, 기사들은 이른바 ‘복기’를 한다. 방금 둔 판에서 어느 대목이 결정적 승부처였는지, 패자는 어떤 실수를 범했는지, 승자는 어떤 묘수를 뒀는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그러려면 대화가 꽤 필요할 듯하지만, 실제로 프로기사들은 복기하면서 말을 하는 경우가 드물다. 대개는 간단한 손짓과 바둑돌 몇 개를 놓는 정도의 동작만으로도 서로 간에 충분히 뜻이 통한다. 일반인이 보기에는 실로 감탄스러운 장면이지만, 복기란 결국 승패 원인의 분석이므로, 다른 스포츠 종목들에서도 일종의 복기가 늘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인간의 삶에서 복기, 곧 반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라고 할 만하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나 늘 복기하면서 산다.
  물론 경기가 끝나자마자 승자와 패자가 머리를 맞대고 반성하는 관행은 스포츠를 통틀어 가장 지적인 종목이라고 할 만한 바둑 특유의 미덕이다. 이 관행이 다른 종목들에서 채택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지막 게임까지 접전을 벌인 탁구선수 두 명이 땀범벅에 거친 호흡과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테이블 옆에 마주서서 방금 끝난 경기의 승부처를 논할 수 있겠는가? 멍들고 찢어져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진 권투선수들의 복기는 말할 나위조차 없다.
  그러나 좀 더 시간이 지난 뒤에 지난 시합을 반성하고 승패의 원인을 따지는 것은 모든 스포츠 선수의 과제일 뿐더러 자연스러운 행동이기도 하다. 특히 패배한 선수는 하지 말라고 해도 그 패배를 곱씹으면서 원인을 따지기 마련이다. ‘내가 왜 졌지?’라는 질문을 던져본 적이 없는 선수가 있을까? 패배를 경험해본 선수라면 틀림없이 한 명도 없을 것이다. 특히 패배가 쓰라릴수록, 우리는 그 원인에 더 강하게 집착하곤 한다. 어쩌면 거꾸로 우리가 패배의 원인에 집착할수록, 그 패배가 더 쓰라리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 인간의 삶에서 복기, 곧 반성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 요소라고 할 만하다.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다
  우리는 왜 원인에 집착할까? 무언가를 제대로 알려면 그것의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주춧돌이다. 조금만 생각하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만한 이 생각에서 대답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이 생각에 따르면 ‘내가 졌다.’를 아는 것은 나의 패배를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졌다. 그리고 그 패배의 원인은 이러이러한 것이다.’를 알 때, 비로소 나의 패배를 제대로 아는 것이다. 사람은 앎을 추구하는 동물이다. 그러니 우리가 패배의 원인에 집착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또한 그렇게 원인에 집착할 때, 우리는 누구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인 셈이다.
  그러나 이런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 즉 모든 일에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문제아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우연’이다. 다들 알다시피 우연이란 그냥 일어난 사건, 원인이 없는 사건이다. 우연의 존재는 모든 사건에 원인이 있다는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적 세계관을 고수하는 사람은 우연의 존재를 인정할 수 없다. 실제로 아인슈타인은 우연이 세계의 작동에 근본적으로 관여한다고 보는 양자물리학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면에 우리는 일상에서 우연을 기꺼이 인정한다. 까마귀가 날아간 것과 상관없이 배는 그냥 떨어지고, 주사위를 던지니 우연히 6이 나오고, 살다보니 우연히 지금의 배우자를 만났다. 이럴 때 우리는 반아리스텔레스주의자다.
  올곧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라면 이런 식으로 우연을 당연시하고 심지어 환영하는 우리를 나태하다고 꾸짖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넙죽넙죽 우연을 인정하는 것은 학자의 태도로서 자격미달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우연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은 얼마나 각박할 것이며, 정말로 우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얼마나 무미건조한 장소일 텐가!
 

▲ 지난 시합을 반성하고 승패의 원인을 따지는 것은 모든 스포츠 선수의 과제일 뿐더러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우연’은 어떤 교훈을 줄까?
  당장에 스포츠를 생각해보자. 탁구에서 우연이 차지하는 몫에 대해서는 나중 기회에 더 자세히 다뤄볼 생각이지만, 일단 확실히 말해둘 수 있는 것은 우연이 기막힌 반전의 계기일 수 있다는 점이다. 시합이 여러 판 계속되면 결국 실력이 강한 선수가 약한 선수보다 더 좋은 평균성적을 얻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기전에서, 특히 한판의 승부, 한판의 랠리에서라면 충분히 얘기가 달라질 수 있다. 약한 선수가 강한 선수를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우연이라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는 복병이 강력한 응원군으로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스포츠에서 우연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앞서 아인슈타인이 우연에 적대적이었다고 말했지만, 그도 맥주 한 병 들고 텔레비전으로 야구경기를 볼 때는 선수의 타격감각이 타율과 상관없이 들쭉날쭉 요동하는 것을 즐겼으리라. 기록의 야구, 통계의 야구를 추구한다는 김성근 감독도 도저히 이유를 알 길 없는 연패에 시달릴 때 우연을 피난처로 삼지 않을까 싶다.
  원인을 분석해서 미래의 거름으로 삼으려는 선수에게 ‘우연’은 어떤 교훈을 줄까? 엘리트 탁구선수의 시합에서 승부를 가르는 가장 큰 요인은 혹시 우연이 아닐까? 만약에 그렇다면 패배의 원인을 분석하는 쓰라리고 고된 작업은 헛일일지도 모른다. 그냥 다음번에 우연히 이기면 될 테니까 말이다. 우연의 몫을 깡그리 무시하는 것은 틀림없이 어리석다.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너무 완벽한 대책을 마련하려 하지 말자. 그러나 탁구를 지배하는 것이 온통 우연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야말로 라켓과 공과 네트와 테이블이 다함께 껄껄 웃을 것이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여전히 호모사피엔스의 철학자이며, 바둑의 복기가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승부의 반성은 경기장 안팎을 막론하고 여기에서도 엄연한 삶의 지혜다.
  다만, 세태가 우연에 더 많은 몫을 허용하는 쪽으로 흐르는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사람이나 역사나 세상을 상대로 이유를 추궁하는 것, 그럴싸한 이유를 넓게 펼쳐 뒤덮어버리는 것, 없는 암반이 나올 때까지 계속 파내려가는 것은 이제 더는 대세가 아니다. 이 세태의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또 이유를 거론하다니 역시나 필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다!) 우연의 몫을 더 많이 인정하는 사회가 우리 각자에게 개인적인 자유를 더 많이 허용하고 북돋는 사회이기를 기대해본다. (월간탁구 2016년 9월호)
 

▲ 그러니, 너무 자책하지 말고, 너무 완벽한 대책을 마련하려 하지 말자.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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