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11) / 전대호

진실 혹은 진리의 거처는 우리의 삶
  요새 사람들은 드라마 하면 주로 텔레비전 연속극을 떠올리는데, 이것은 시장문화 특유의 요란한 과장법의 혐의가 짙긴 해도 아예 틀린 어법은 아니다. 본래 드라마란 ‘행동으로 보여주는 이야기’, 간단히 말해서 극(劇)이다. 그러니까 드라마의 원형은 고대 그리스 반원형 극장에서 배우들과 합창단이 관객도 다 아는 오이디푸스 왕의 전설을 짜임새 있는 행동으로 보여주던 행사 정도가 되겠다. 그러니 1968년 라디오드라마로 데뷔하여 여전히 건재한 드라마 작가 김수현이 지어내는 이야기들도 넓은 의미에서 드라마인 것은 틀림없다. 비록 화면 속에서이기는 하지만 인물들이 행동을 통해서 그 이야기들을 보여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필자는 소포클레스(고대 그리스), 셰익스피어(16세기 말 영국), 게오르크 뷔히너(19세기 초반 독일) 같은 굴지의 극작가들을 생각하면 현재의 텔레비전 연속극을 드라마로 부르기가 못내 꺼려진다. 그래서 번역하거나 글을 쓸 때도 굳이 ‘연속극’이라는 어느새 듣기 어렵게 된 용어를 고집한다. 서양숭배에 엘리트주의가 겹친 꼴불견이라고 손가락질한다면, 이런 변명을 시도해보겠다. 내가 아는 진짜 드라마는 그 어떤 삶보다도 생생하고 황홀하며 애틋하다. 물론 결정적인 변명이기는 어렵다는 것을 안다. 주말 저녁 한 시간 동안 텔레비전 앞에서 울고 웃는 시청자들 또한 무엇으로도 대체하기 어려운 생생함과 황홀함과 애틋함을 느낄 테니까 말이다.
  아무튼 필자는 드라마를 감히 연속극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로 띄우려 애쓰는 사람이지만 흥미롭게도 스포츠를 드라마로 칭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불만이 없다. 아니 오히려 적극적으로 환영한다. 왜 그럴까? 필시 ‘진실’ 때문이다. 텔레비전 연속극에는 있기 어려운 진실이 스포츠에는 흔히 있기 때문이다. “진실? 대체 그게 뭐냐?” 이 유명한 질문은 잡혀온 예수가 진실을 운운하자 그를 심문하던 빌라도가 내뱉는 말이다(요한복음18:38) 예수는 대꾸하지 않았고, 필자도 딱히 할 말은 없다. 다만 진실 혹은 진리의 거처는 우리의 삶이라는 것, 그리고 좋은 드라마와 스포츠는 우리의 삶을 쏙 빼닮았다는 것, 텔레비전 연속극은 우리의 삶을 몹시 어설프게 닮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뿐이다.
 

▲ “할 수 있다!”로 유명해진 펜싱선수 박상영의 환호! 작년 리우올림픽에서 연출한 기막힌 역전극이 배경이다. 이 순간에 ‘진실’이 있다.

‘절정’의 미학
  삶과 드라마와 스포츠는 시간 속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무한히 진행될 수는 없기에 시작과 중간과 끝이 있기 마련이고, 중간은 다시 절정을 향한 상승 구간과 절정 이후의 하강 구간으로 나뉜다. 이런 식의 진행, 곧 줄거리를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흔히 ‘기승전결(起承轉結)’을 말하는데, 이것은 본래 한시(漢詩)를 짓는 요령이라고 한다. 알다시피 한시는 가장 간결한 형태의 문학에 속한다. 따라서 적당한 시간 동안 이야기를 펼쳐서 보여줘야 하는 드라마와는 줄거리를 짜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라 ‘기승전결’에서 절정에 해당하는 부분은 분명 ‘전’일 텐데, ‘전’에 이어 곧바로 ‘결’이 온다면, 즉 ‘뒤집힘’이 일어나자마자 곧바로 이야기가 종결된다면, 관객은 몹시 당황할 것이다. 짧은 한시를 읽거나 듣는 사람이라면 머릿속에 남은 시구들을 몇 번 되새기면서 그 갑작스러운 종결의 맛을 음미할 수 있겠지만, 두세 시간짜리 드라마를 관람한 관객이 그렇게 하기는 무척 어려울 것이 뻔하다.
  하지만 드라마의 줄거리에서 한가운데 등장하는 ‘절정’과 한시 작법에서 말하는 ‘전’이 거의 같은 의미라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가장 응축된 순간(절정)은 곧 뒤집힘의 순간일까? 딱히 설명할 길은 없지만, 꽤 그럴 듯하게 들린다. 절정에 이르는 순간, 시작은 영영 멀어지고 끝이 성큼 다가온다. 결정적인 퍼즐조각 하나가 맞춰지는 순간, 처음으로 큰 그림이 보이기 시작한다. 돌림판 위에서 회전하던 흙덩어리가 보이지 않는 도예가의 손길을 받아 그릇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다.
  물론 ‘절정’을 어느 한 순간으로 특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시작이 영영 멀어지고 끝이 성큼 다가오는 일은 꽤 오랜 시간 동안 일어날 수도 있다. 아마 많은 사람들의 삶에서 절정이 그러할 성싶다.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여기가 절정인 줄 모르고, 여기가 뒤집힘인 줄 모르고 엎치락뒤치락 분투하며 늙어가다가 불현듯 끝이 다가왔음을 느끼곤 하지 않는가. 또 절정이 여러 번일 수도 있겠다. 한시 작법에서는 금물이겠고, 드라마 작법에서도 무척 실험적인 작품을 시도하는 것이 아니라면 피해야할 설정이겠지만, ‘새옹지마(塞翁之馬)’라는 옛말이 이르듯이 삶은 여러 번 뒤집힐 수 있지 않겠는가.
 

▲ 스포츠의 절정은 ‘역전(逆轉)’에 있다. 역시 지난 올림픽에서 정영식이 기막힌 역전승을 거두던 순간.

진실은? ‘역전(逆轉)’이다!
  삶과 드라마에 생기를 불어넣는 그 ‘절정’ 혹은 ‘뒤집힘’은 스포츠에서 무엇에 해당할까? 단언하건대 ‘역전(逆轉)’이다. 이기던 편이 뒤로 밀리고 지던 편이 치고나가는 상황. 실컷 매를 맞아 허우적거리던 선수의 한방이 턱에 꽂혀 멀쩡하던 상대가 벌렁 자빠지는 상황. 스포츠의 매력이 100이라면 그중 70 이상은 역전의 매력일 것이다. 한 판의 시합 동안에 역전은 여러 번 일어날 수 있다. 더구나 ‘역전될 뻔한 상황’까지 합치면, 웬만한 스포츠의 줄거리는 지리산 주능선의 굴곡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도 남는다. 그러니 이 기막힌 드라마에 어찌 빠져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빌라도가 “진실이 무엇이냐?”라고 물었을 때, 예수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나라면 “역전이다!”라고 말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쯤 되면 거의 선문답 수준일 수도 있겠지만, 아예 엉뚱한 대답은 아니라고 강변하고 싶다. 역전은 이김이 짐으로, 앞서감이 뒤처짐으로, 흑이 백으로, 밤이 낮으로, 음이 양으로 뒤집힘이다. 이것이 진실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이 진실이겠는가. 사람들은 스포츠의 역전극에 열광한다. 역전이 일어날 때 황홀경에 빠진다. 굳이 철학 따위 공부하지 않아도, 바로 그런 역전, 그 놀라운 뒤집힘에서 어렴풋하게나마 진실의 향기를 맡기 때문일 것이다. (월간탁구 2016년 10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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