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13) / 전대호

장풍에 깃든 진실
  무술을 둘러싼 허풍의 세계가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주는 영화로 필자가 첫손가락에 꼽는 것은 <와호장룡>이다. 꼭 한창 때의 장쯔이가 출연하기 때문은 아니다. 그 영화의 아름다움은 그 멋진 여배우의 매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바람에 일렁이는 대숲에서 남녀 한 쌍이 마치 새처럼 대나무 꼭대기에서 검술을 겨루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합리적으로 따지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다. 사람이 지붕 위로 솟구치질 않나, 백조처럼 수면에 발자국을 찍으며 호수를 건너질 않나, 손가락 끝으로 옆 목을 눌러 상대를 마비시키질 않나…….
  영화 전문가들은 그런 환상적인 장면을 보면서 와이어 액션과 컴퓨터 그래픽을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필자는 그 거침없는 허풍에 깃든 진실을 탐색한다. 무릇 아름다움은 참됨과 무관할 리 없다. 아름다움이란 어쩌면 진실의 첫인상일 것이다. 당신이 장풍에서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장풍에 일말의 진실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적어도 필자는 그렇게 믿는다. 하여 이번 글에서는 장풍이라는 허구에 담긴 실질적 교훈을 짚어보려 한다. 탁구 선수는 장풍의 전설에서 과연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불교에서 전해오는 바람과 깃발과 마음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수행자 두 명이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며 논쟁한다. 깃발이 움직이는가, 아니면 바람이 움직이는가, 라는 질문이 쟁점이다. 한 수행자는 깃발이 움직인다고 하고, 다른 수행자는 바람이 움직인다고 맞선다. 그때 세 번째 수행자가 나타나 이렇게 말한다.
  “바람도 아니고 깃발도 아니라,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어렵게 생각하면 한없이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이 이야기가 표현하는 여정만큼은 충분히 분명하다. 그 여정은 확연히 눈에 띄는 깃발에서 출발하여 그 자체로는 눈에 띄지 않지만 몸으로 느껴지는 바람을 거쳐서 모든 감각과 생각과 상상과 경험을 총동원할 때 비로소 다가갈 수 있는 마음을 향한다. 한 마디로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나아가는 여정이다.
 

▲ 마치 새처럼 대나무 꼭대기에서 검술을 겨루던 바로 그 영화! <와호장룡>의 한 장면이다.

장하구나, 하산하여라!
  속세를 등지고 산속에서 탁구를 수련하는 사람들은 물론 없겠지만, 그런 사부와 제자가 있다고 치고, 위 이야기를 본떠서 탁구공과 라켓과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지어내보자. 입산 수련이 어느새 몇 년이던가, 제자의 기량은 일취월장하여 이제 사부를 능가한다. 하산할 때가 되었음을 제자도 알고 사부도 안다. 매화 꽃잎 흩날리는 어느 봄날, 사부가 제자를 불러 탁구대에 마주 선다. 두 사람은 시합 직전에 선수들이 하듯이 가장 초보적인 스트로크를 주고받는다. 마지막 시합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사부가 문득 공을 잡더니 이렇게 묻는다.
  “라켓이 공을 때리는 것이냐, 공이 라켓을 때리는 것이냐?”
  제자가 빙그레 웃으며 답한다.
  “제 마음과 사부님의 마음이 부딪히는 것입니다.”
  다음 대사는 무협지에 흔히 나오는 그대로다.
  “장하구나, 하산하여라.”
  ‘라켓이 공을 때린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하수다. 라켓을 움직여 공을 맞히려는 생각에 골몰하는 사람이 탁구를 잘 할 수 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엘리트 선수는 말할 것도 없고 동호인 수준에서도 라켓을 어지럽게 휘두르며 공을 따라다니는 사람은 실속 없이 바쁘기만 할 따름이다. 우리는 흔히 잠자리채를 그렇게 휘두르지만, 곤충 채집에 능숙한 사람들은 잠자리채조차도 그렇게 휘두르지 않는다. 그들의 동작은 어떤 망설임이나 미세 조정도 없이 결연하고 단순하다. 훌륭한 탁구선수의 라켓 운용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날아오는 공을 보고 라켓을 뻗을 것이 아니라, 공이 어디로 날아올지 미리 예측하고 거기로 가있는 것이 열쇠다. 공을 따라다니지 말고, 내가 치기 좋은 방향으로 공이 날아오도록 만들라는 얘기다. 그러려면 당연히 팔보다 다리가 훨씬 더 부지런해야 한다. 이 수준에서는 “라켓이 공을 때린다.”보다 “공이 라켓을 때린다.”가 진실에 더 가깝다. 한 발짝 먼저 움직인 선수를 향해 공이 날아오고, 라켓은 그런 공을 다소곳이 맞이할 뿐이다. 어쩌면 선수는 상대와 공에 초점을 맞추고 자기 라켓은 아예 잊을 것이다.
 

▲ 정영식이 받아넘긴 것은 탁구공이라기보다 마롱의 마음이었다?!

대결의 본질은 마음과 마음의 부딪힘
  그렇다면 “마음과 마음이 부딪힌다.”라고 생각하는 경지는 어떤 것일까? 필자로서는 그저 짐작해볼 따름이지만, 아마도 라켓뿐 아니라 공마저 잊는 것이 이 최고 경지의 특징이 아닐까 생각한다. 허무맹랑한 얘기로 들린다면, 지난 리우올림픽에서 정영식 선수가 여러 번 보여준 동물적인 백핸드 리턴을 떠올려보라. 마롱이 친 공을 정영식이 눈여겨보고 의도적으로 라켓을 놀려 받아넘기던가? 그런 방식으로는 그토록 빠른 반응이 나올 길이 없다. 정영식이 받아넘긴 것은 탁구공이라기보다 마롱의 마음이었다. 바꿔 말하면, 정영식의 과감하고 영리한 예측이 알맹이였고 공과 라켓의 충돌은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다.
  라켓도 잊고 공도 잊으면, 상대의 마음과 나의 마음만 남는다.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마주선 두 마음이 부딪히는 것이다. 곰곰 따져보면, 스포츠라는 것이 결국 마음과 마음의 부딪힘이 아닌가. 태권도에서는 주먹과 발이 날아가 표적을 때리지만, 실력 향상을 위해서는 주먹과 발을 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발을 잊고 허리에 주의를 집중할 때 비로소 그럴싸한 동작이 나온다. 더 나아가 허리마저 잊고 몸 전체의 균형과 호흡에 집중할 때, 정말 강하고 아름다운 타격이 가능하다. 숱한 명상가들이 말하는 대로,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마음에 다가가는 최선의 길이므로, 최고 수준의 태권도선수는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잊고 오롯이 마음으로서 상대의 마음과 겨루는 셈이다. 최고의 탁구선수도 마찬가지리라 짐작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장풍과 무슨 상관일까? 필자가 보기에 장풍의 전설에는 무릇 대결의 본질은 마음과 마음의 부딪힘이라는 진실이 깃들어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는 깃발, 라켓, 공, 주먹, 발이 아니다. 그 모든 것을 잊어라. 발놀림, 허리의 움직임, 몸 전체의 균형, 호흡이 훨씬 더 중요하다. 더 나아가 이것들마저 잊고 마음으로 돌아갈 때 비로소 마음과 마음이 겨루는 최고의 한 판이 펼쳐지리라. 오로지 두 가닥 바람이 뒤엉키는 대결. 이것이 필자가 장풍의 전설에서 읽어내는 교훈이다. (월간탁구 2016년 12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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