꾸준히 성장하는 차세대 에이스

<피플&핑퐁>

유한나(문산수억중학교 3학년)
꾸준히 성장하는 차세대 에이스


문산수억중학교 3학년 유한나는 한국여자탁구 공격수 부재의 아쉬움을 덜어줄 재목감으로 꼽히는 기대주다. 지난달 아산에서 열린 아시아 주니어&카데트 탁구선수권대회에서도 한국 여자카데트팀의 단체 준우승을 이끌며 기대에 보답했다. 개인전에서는 아쉽게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오히려 좋은 약을 삼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금 늦게 시작했지만 우직한 성장을 멈추지 않고 있어 더욱 각별한 기대를 모으는 선수, 아시아선수권 직후 ‘한나’의 탁구를 돌아봤다.
 

 

#1.
  새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다. 알은 세계이다.
 
 - 헤르만 헤세 <데미안> 中에서

#2. 시작, 독특하고도 재미있던
  한나가 탁구에 입문하게 된 계기는 독특하고 재미있다. 2학년 겨울방학 무렵 엄마 이상숙 씨가 고향인 당진에 있는 한 탁구장의 ‘주부 살빼기 교실’에 등록했던 것이 시작. 엄마는 방학 때 아이를 맡겨둘 곳이 없어 한나와 함께 탁구장을 갔는데, 우연히 라켓을 잡아본 한나가 남다른 소질을 보였다. 탁구장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김봉수 당진 탑동초등학교 당시 코치가 제대로 선수를 해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권유를 할 정도였다. 그 이후 약 한 달간 모녀는 계속 탁구장을 다녔는데, 정작 운동을 하려 했던 엄마 대신 한나가 날마다 테이블 앞에 섰다고.
  3학년이 된 한나는 결국 김봉수 코치와 함께 탑동초등학교 탁구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탑동초등학교는 남자탁구부였다. 거칠고 장난기 많은 남자친구들 속에서 운동하기를 마다하지 않았을 만큼 한나는 이미 탁구의 매력에 빠져 있었던 걸까. 재질을 알아본 지도자와 작은 불편쯤은 감수하게 하는 탁구랠리의 중독성, 무엇보다도 엄마의 다이어트! 게다가 학교에서만으로는 생활고가 해결되지 않는 초등학교 지도자의 속사정까지! 몇 가지 우연이 겹치지 않았다면 ‘유망주’ 유한나는 지금쯤 평범한 중3 소녀로 남아있었을지 모른다.
 

▲ 한나는 파워와 세기를 겸비한 선수다. 서비스에도 강점을 지녔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3. 1등보다 2등을 더 많이 했던
  한나는 지금까지 1등보다 2등을 더 많이 했다. 에이스로 팀의 단체우승을 이끌 때에도, 결승 상대가 바뀌어도 개인단식에서는 좀처럼 정상에 서지 못했다. 초등학교 시절 문체부 학생종별 개인단식에서 5학년, 6학년 2년 연속 결승에 올랐지만 두 번 다 준우승에 그쳤다. 5학년 때 출전한 초등연맹 우수선수 초청대회도, 6학년 때 출전한 대통령기 대회에서도 최종전에 진출했지만 2등으로 만족했다.
  개인전 최고 성적 없이 중학교(문산수억)에 진학했지만 한나의 가능성을 의심하는 탁구인들은 많지 않았다. 한나는 여자선수로는 드물게 파워를 타고 난데다 임팩트에 힘을 실을 줄 아는 감각까지 겸비했다. 게다가 누구나 상대하기 꺼려하는 왼손 셰이크핸드 전형이다. 해당 연령대를 넘어 한국 여자탁구를 대표할 만한 재목이라는 평이 늘 따라다닌 이유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한나가 꾸준히 성장해왔다는 사실이다. 한나는 요즘 추세로는 늦은 나이인 초등학교 3학년 때 입문했고, 경기도 여자초등부 명문팀 군포화산초등학교로 전학한 4학년부터야 제대로 된 선수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입문 2년 만에 초등 우수선수 초청대열에 진입했고, 6학년 때는 소년체전 금메달 주역이 됐으며, 호프스 국가대표로도 뛰었다. 늦은 시작이었지만 우직한 성장은 그리고, 중학교 1학년 마지막 대회였던 중‧고종합 개인단식에서 마침내 우승으로 증명된다. 한나 스스로 기억하는 지금까지 시합 중 가장 기뻤던 대회다(한나는 1년 뒤 같은 대회에서 다시 우승하며 2연패를 이뤄냈다).
 

▲ 1학년 12월에 있었던 중‧고종합에서 선배들을 모두 꺾고 우승했다. 당시 경기 모습.

#4. 아시아 주니어&카데트 선수권대회
  자라나는 선수를 두고 굳이 1등, 2등 성적으로 실적을 구분할 필요는 없을지 모른다. 사실 한나는 국내 대회보다 국제대회에서 더 뚜렷한 존재감을 보였다. 지난해 아시아 주니어&카데트 탁구선수권대회에서 개인단식 4강에 올랐다. 당시 대회에서 한나는 8강전에서 홍콩의 기대주 리카위를 이긴 뒤 4강전에서 일본의 키하라 미유에게 졌다. 3위로 만족했지만 국제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명한 유일한 한국선수였다. 이 대회를 기반으로 초청된 월드카데트 챌린지에서는 중국의 황잉치와 함께 여자복식을 우승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같은 대회, 지난달 한국의 아산에서 있었던 올해 아시아 주니어&카데트 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나는 다시 한 번 맹활약했다. 신유빈(청명중), 이다은(호수돈여중)과 함께 단체전 준우승을 견인했다. 8강전에서 싱가포르, 4강전에서 일본을 꺾었다. 결승전에서 중국에 패했지만 라이벌 일본을 제압한 것은 작지 않은 의미가 있는 승부였다. 한국 여자카데트가 이 대회에서 단체전 결승에 진출한 것은 무려 6년 만의 일이다. 비록 8강에 머물렀지만 개인전에서도 한국 선수들 중에서는 최고 성적을 낸 한나는 올해 월드 카데트 챌린지에 도전할 수 있는 자격까지 스스로 획득했다. 작년에 이미 경험이 있는 한나는 10월 피지에서 열리는 올해 월드 챌린지에서 보다 나은 성적을 목표로 한다.
 

▲ 개인단식 8강전, 격전 끝에 아쉬운 패배를 당했다. 졌지만 ‘한나’는 잘 싸웠다.

#5. 아쉬움 남은 개인단식
  그렇긴 해도 개인단식은 곱씹을수록 아쉬움이 남는다. 16강전에서 홍콩의 차우윙츠와 풀-게임접전을 벌여 승리한 한나는 8강전에서 일본 수비수 소마 유메노와 또 한 번 격전을 치렀다. 게임스코어 2대 2에서 시작한 5게임, 9-3까지 앞서면서 4강 진출을 목전에 뒀던 한나는 거기서부터 추격을 허용해 통한의 역전패를 당했다. 듀스와 세 번의 어게인 끝에 13-15로 승리를 내주고 말았다. 경기를 지켜본 여자대표팀 박지현 감독은 “한나도 끝까지 집중력을 유지했지만 보통 수비수와는 앞뒤 러버를 반대로 쓰는 상대가 워낙 까다로웠다.”고 평했다.
  한나를 이긴 소마 유메노는 실제로 강한 상대였다. 4강전과 결승전에서 연속으로 만난 중국 선수들을 모두 이기고 결국 우승까지 차지했다. 소마 유메노와 가장 치열한 접전을 펼친 상대는 4강 이후가 아닌 바로 한나였다. 엄마 이상숙 씨는 “한나가 그렇게 크게 파이팅을 외치며 시합하는 것을 처음 봤다. 울컥했다.”고 말했다. 한나는 “지더라도 최선을 다한 경기는 아쉽지 않다.”고 어른스럽게 말했다. 우승하는 소마를 보면서 한나는 “어이가 없다”는 역설적 표현과 함께 소녀다운 웃음을 지어보였는데, 그 미소는 소마와의 경기가 이후 한나의 탁구에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될 거라는 예감을 갖게 했다. 결과는 곱씹을수록 아쉬웠지만 2017 아시아 주니어&카데트 탁구선수권대회에서 한나는 누구보다 많은 것을 얻었다.
 

▲ 새는 알을 깨고 세상에 나온다. 더 이상 움츠러들지 않을 것이다.

#6. 한나는 졌으되 지지 않았다
  한나는 사실 가진 재능을 실전에서 모두 쏟아내지 못하는 단점이 없지 않았다. 소속팀 문산수억중학교의 김상학 코치는 한나에 대해 “폭발적인 공격력이 강점이지만 위기관리 능력이 떨어진다.”고 말한다. 덧붙여 “경기 중의 감정기복이 있는 편”이라는 조언을 남겼는데, 경기 중에는 웬만해선 큰 소리로 파이팅을 하지 않고, 잘하던 경기를 급작스레 망치곤 하던 한나의 모습이 충고 속에 담겼다. 하지만 이번 아시아대회대로라면 보완이 멀지 않은 듯 보인다. 한나는 어느 때보다도 밝은 표정으로 동료들을 다독였으며, 개인전에서도 예전 같았으면 포기했을 상황에서도 그야말로 최선을 다했다. 위기관리 능력은 여전히 문제였지만 코트를 나오는 한나의 상기된 표정에서는 패자의 인상이 묻어나지 않았다. 한나는 졌으되 지지 않았다.
  아시아대회 대표팀 코치를 맡아 이번 대회에서도 한나의 경기를 벤치에서 지도한 김상학 코치도 “보완하고 있는 과정이며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덧붙여 “꾸준히 성장하면 한국탁구를 이끌 재목임엔 틀림없다.”고 자신했다.
  잘하고 싶지 않은 선수는 단 한 명도 없다. 그 의욕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 표출되는 감정의 모습이 각기 다를 뿐이다. 아직 만 15세에 불과한 한나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한나는 많은 이들이 인정하는 특출 난 재능이 자기 뜻대로 제어되지 않을 때 스스로 더욱 움츠러들었던 건 아닐까. 아산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 한나는 마침내 안으로 숨겼던 자신의 탁구를 한껏 세상에 펼쳐 보일 준비를 시작한 느낌이다. 아직은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자신의 ‘봉인’을 해제할 때 한나의 폭발력은 어느 정도일까?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파괴해야만 한다(같은 책).
 

▲ 8월 초 주니어대회 선발전에 도전한다. 부담없이 싸우겠다고 다짐했다.

#7. 노력의 팔 할은 자신의 의지!
  최근 한국 여자탁구는 믿을만한 공격수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아직은 성급한 기대일 수 있지만 한나가 그 빈자리를 채워줄 재원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나에게는 탁구에 대한 욕심이 있다. 같은 왼손 전형 공격수들 중국의 딩닝과 한국의 최효주(삼성생명)의 플레이를 닮고 싶다는 한나는 여느 선수들처럼 올림픽에 나가는 것이 꿈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올림픽 메달을 못 따는 한이 있더라도 중국과 일본의 라이벌들은 이기고 싶다”는 오기를 내비칠 줄도 안다.
  재능과 욕심을 겸비한 선수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지는 탁구인들에게 주어져있는 몫이기도 하다. 줄탁동기(茁啄同機)라는 사자성어는 ‘병아리가 알에서 깨어나는데도 스스로 알 속에서 쪼아대는 노력과 함께 어미 닭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의지와 노력이 중요하지만 외부의 도움이 필요한 것은 당연지사다. 한나가 자신의 바람대로 한국탁구 에이스로 서는 날, 한국탁구도 오랜 침체기를 깨고 나와 세계무대를 향해 날 수 있지 않을까. 엄마를 따라갔던 탁구장에서 우연히 선수의 길에 들어선 한 소녀가 올림픽 시상대에 서는 극적인 순간을 기대해본다.
  물론 노력의 팔 할은 자신의 의지! 한나는 8월 초 있을 세계주니어탁구선수권대회 파견 선발전에 출전한다. 고등학교 선배들 사이에서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시험한다. 한나는 “언니들과 싸우지만 부담 갖지 않고 할 수 있는 거 다하고 나오겠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글_한인수 | 사진_안성호 (월간탁구 2017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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