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14) / 전대호

인간은 유난히 공놀이를 즐긴다
  스포츠 종목들을 나열해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인간이라는 동물은 유난히 공놀이를 즐긴다. 물론 고양이와 개도 공놀이 비슷한 것을 종종 하지만, 인간의 공놀이 사랑은 그 정도 행태와 차원이 다르다. 따지고 보면 고양이와 개의 공놀이도 인간이 전수해준 것으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서커스와 쇼에 나오는 코끼리, 물개, 펭귄, 돌고래의 공놀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왜 인간은 공놀이를 이토록 좋아할까?
  이 어려운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연습문제를 풀어보자. 역시 만만치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조금 더 쉬운 그 연습문제는 이것이다. ‘인간은 왜 주먹을 가지고 있을까?’ 실제로 이 문제는 필자가 만났던 전직 프로복서 한 이가 대화중에 진지하게 던졌던 질문이기도 하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그는 신이 인간에게 주먹을 장착해준 이유를 모르겠다고 했다. 그가 보기에 주먹은 명백한 인명살상 무기였다. 그러니 사랑과 평화의 신을 믿는 그로서는 말끝을 흐릴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어. 하나님이 사람에게 이런 끔찍한 무기를 주시다니….”
  주먹이 인간을 향한 무기라는 점은 명백하다. 일반적으로 펀치는 인간 어깨 높이의 표적을 향할 때 가장 강한데, 인간과 덩치가 비슷하면서 그 높이에 급소를 가진 동물은 인간밖에 없다. 유독 인간만 곧추 서서 두 다리로 걷기 때문에 급소로 가득 찬 얼굴과 머리를 상당히 높은 위치에 둔다. 다른 동물들의 머리는 인간의 어깨보다 한참 아래에 있다. 그 동물들에게 적합한 공격은 주먹질이 아니라 몽둥이질이나 발길질이다. 누가 봐도 주먹은 약간 웅크린 인간의 턱을 가격하기 위해 진화한 무기다.
  왜 진화는 인간에게 주먹을 선물했을까? 간단히 대답할 수 있다. 그 고성능 무기를 가진 인간들이 살아남은 것이다. 지금은 인간을 뜻하는 ‘호모’가 학명에 붙은 종이 호모사피엔스 하나만 남았지만, 과거에는 호모사피엔스 말고도 여러 호모 종들이 경쟁했다. 그들 중 일부는 주먹이 약했을 테고 일부는 강했을 것이다. 생존을 위한 싸움은 흔히 벌어졌을 테고, 호모 종들끼리의 싸움에서 강한 주먹은 결정적인 장점이었을 것이다. 결국 호모사피엔스만 살아남은 것을 보면, 아마도 호모사피엔스의 주먹이 가장 강했던 모양이다.
 

▲ 호모사피엔스의 주먹? 한국 최초 구석기 발굴지인 공주 석장리를 가보면 박물관에서 이런 심오한(?) 형상의 조각 작품도 만날 수 있다.

사람은 사람을 상대하기 마련이다
  물론 과학적으로 엄밀한 추론은 아니다. 강한 주먹이 호모사피엔스의 생존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과연 기여한 것은 맞는지 확인하려면 실증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꺼낸 것은 어떤 중대한 철학적 원리를 주먹에서도 읽어낼 수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 원리는 ‘사람은 사람을 상대하기 마련이다.’라는 것이다. 사람이 싸운다면, 상대는 사람이기 마련이다. 사람이 놀이를 한다면, 상대는 사람이기 마련이다.
  다른 동물들, 예컨대 사자는 사자를 상대하지 않느냐고 묻는 분이 있다면, 야생 사자 새끼들의 놀이를 생각해보라고 말씀드리겠다. 사자 새끼들은 서로 올라타고 목을 물면서 논다. 그 놀이는 아마도 사냥 연습이며, 사냥의 상대는 사자가 아닌 초식동물이다. 요컨대 사자의 상대는 기본적으로 먹잇감이다. 사자가 자신과 동등한 사자를 상대하는 일은 영역 다툼 같은 특별한 상황에서 드물게만 벌어진다.
  ‘사람은 사람을 상대하기 마련이다.’라는 원리는 ‘인간(人間)’이라는 단어에도 들어있다. 알다시피 ‘인’은 사람, ‘간’은 관계를 뜻한다. 그러니 ‘인간’이라는 단어는 사람을 가리킬 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의 관계도 암시하는 멋진 단어다.
  혹시 ‘왜 인간은 공놀이를 좋아할까?’라는 어려운 질문에 답하기 위한 실마리를 ‘사람은 사람을 상대하기 마련이다’라는 원리에서 얻을 수 있을까? 필자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공놀이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물체가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을 만들어낼 수 있는 동물, 즉 물체를 내던지거나 후려치거나 쏘아서 공중으로 날려 보낼 수 있는 동물은 사실상 인간밖에 없다. 특히 인간의 던지기 능력은 인간보다 훨씬 더 힘센 고릴라의 던지기 능력을 훌쩍 뛰어넘는다. 지구상의 어디에서든 당신이 시속 13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날아가는 물체를 본다면, 인간이 그 물체를 날려 보냈다고 확신해도 좋다.
 

▲ 인간은 유난히 공놀이를 즐긴다. 최근에는 탁구와 족구를 결합한 이런 종목도 생겼다. 이름하여 Teqball.

싸움에서 놀이로! 탁구에 깃든 탁월한 승화
  호모사피엔스의 던지기 능력은 진화 역사에서 흥미로운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네안데르탈인의 멸종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네안데르탈인은 호모사피엔스보다 덩치와 뇌가 더 컸고 상당한 수준의 문화를 발전시켰으며 다양한 도구도 사용했다. 그런데 뒤늦게 네안데르탈인의 영역에 발을 들인 호모사피엔스에게 밀려나 멸종했다. 왜 그랬을까? 한 이론에 따르면, 호모사피엔스의 던지기 능력이 결정적인 요인들 중 하나였다. 힘센 네안데르탈인은 창을 손에 쥐고 휘두르기만 한 반면, 호모사피엔스는 창을 던질 줄 알았다. 창을 날려 보낼 줄 모르는 동물은 날아오는 창을 피하는 솜씨도 미숙하기 마련이다. 호모사피엔스의 창던지기 전술 앞에서 네안데르탈인은 그야말로 추풍낙엽이었을 것이다.
  돌팔매부터 투창, 화살, 총, 포,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를 공중으로 날려 보내는 것은 인간 특유의 행동이다. 이 특징은 역시 인간 특유의 행동인 공놀이와 무관할까? 네안데르탈인이 멸종한 뒤에도 호모사피엔스는 호모사피엔스를 상대로 던지기 전술을 애용했을 것이 뻔하다. 그런 상황에서 살아남으려면 날아가는 물체의 궤적을 최대한 신속정확하게 예측하고 몸을 움직여 반응하는 솜씨가 절실히 필요했을 것이다. 따라서 그 솜씨를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목숨이 걸린 과제였을 것이다. 필자는 그 절실한 솜씨를 익히기 위한 방편으로 원시적인 공놀이가 발생하여 오늘날 우리가 즐기는 각종 구기 종목으로 발전했다고 추측한다.
  탁구는 공놀이를 통틀어 공의 운동이 가장 미묘한 종목, 공에 무기의 성격이 가장 약하게 남아있는 종목인 듯하다. 그런 의미에서 탁구는 싸움에서 놀이로의 승화를 가장 탁월하게 이뤄낸 종목들 중 하나이지 싶다. (월간탁구 2017년 1월호)
 

▲ 탁구는 싸움에서 놀이로의 승화를 가장 탁월하게 이뤄낸 종목들 중 하나이지 싶다. 2016년 한국실업탁구대회 중의 한 장면.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 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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