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18) / 전대호

수단? 항상 또한 목적으로 대하라!

철학자 칸트를 대표하는 문장으로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을 꼽는다. 한 편으로 백번 옳은 말이지만, 속세를 헤쳐 가는 생활인의 귀에는 순진한 도덕군자의 비현실적인 훈화말씀처럼 들리기도 한다.

우리의 생계가 걸린 시장을 생각해보라. 인간이냐 동물이냐 물건이냐를 막론하고 무릇 존재는 일단 시장에 나오면 상품의 성격, 곧 이윤 취득을 위한 수단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어디 그뿐이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상당한 정도로 수단이다. 아무리 주연배우라도, 심지어 연출가라도, 연극의 목적에 반하는 행동을 할 권리는 없다. 그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개인이라도 다른 개인으로 교체될 수 있다. 회사 조직 내의 개인, 특별한 프로젝트를 위한 팀의 구성원도 마찬가지다. 눈 덮인 산정의 토굴 안에서 가부좌를 튼 개인이라면 모를까, 현실에서 먹고사는 개인이 수단이 아닌 목적의 지위를 자부하거나 타인에게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럼 칸트는 세상물정 모르는 도덕 선생에 불과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칸트의 정확한 가르침은 ‘인간을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또한 목적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요컨대 이 예리한 철학자는 우리가 서로를 수단으로 대하는 것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 자신이나 타인을 수단으로 대할 때에도 또한 동시에 목적으로 대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관점의 이중화가 불가피하다. 우리는 인간을 볼 때, 수단으로 보는 관점(수단-관점)과 목적으로 보는 관점(목적-관점)을 둘 다 가동해야 한다. 물론 칸트가 중시하는 것은 목적-관점이므로,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를 그의 가르침으로 여기는 통념도 아예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칸트가 수단-관점을 배제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은 현실을 읽으려 하는 철학자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필자는 판단한다.
 

▲ 스포츠의 목적은 스포츠 그 자체라는 대답도 가능할까? 이 질문 앞에서 2016년인가 종합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오상은-준성 부자 복식조의 모습이 문득! (벌써 오래 전 일이 돼버렸지만...)

우리에게 스포츠는 수단일까, 목적일까?

‘수단이냐 목적이냐?’라는 질문은 인간 자체뿐 아니라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대해서도 제기할 수 있다. 대리운전 기사에게 대리운전은 수단일까 목적일까? 상식을 초월한 예외의 가능성을 일단 제쳐놓는다면, 당연히 수단일 것이다. 그럼 2년차 9급 공무원에게 공무원 생활은 수단일까 목적일까? 세계적인 피아니스트에게 연주는 아마도 목적일 듯한데, 과연 온전히 목적일까?

이제 핵심 질문을 던질 차례다. 우리에게 스포츠는 수단일까, 목적일까? 수단이라고 대답한다면, 그 이유를 쉽게 댈 수 있다. 사람들은 스포츠의 목적으로 다양한 것들을 거론하지 않는가. 예컨대 아마추어는 건강, 재미, 감정조절 능력, 생활의 활력, 진취적 기상 따위를 꼽을 것이다. 또 김연아나 박태환을 선망하며 선수의 길에 들어선 청소년은 인기, 명예, 부귀를 꼽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국위선양을 스포츠의 목적으로 꼽는 사람도 과거보다 줄긴 했겠지만 여전히 많을 것이다.

스포츠의 목적은 스포츠 그 자체라는 대답도 가능할까? 당연히 가능하다. 더구나 이 대답은 이른바 올림픽정신을 대표한다. “참가에 의의를 두고” 올림픽에 참가한다는 말은 스포츠를 위해서 스포츠를 하겠다는 뜻이다. 스포츠는 그 자체로 목적이라는 뜻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말은 스포츠 선수에게 더없이 반갑고 고맙다. 스포츠의 지위를 한껏 높이다 못해 절대화하는 말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보자. 정말로 오롯이 “참가에 의의를 두고” 올림픽에 나가는 선수가 과연 몇이나 될까?
 

▲ 스포츠와 삶의 얽힘은 때로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같은해 종합선수권대회 때의 모습이다. 이다솜-전지희 조(포스코에너지)가 여자복식 우승을 확정하던 순간이다.

스포츠와 삶의 얽힘은 불가피하다

스포츠는 삶의 한 부분이다. 속세의 온갖 이해관계가 스포츠에 스며드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다. 바꿔 말해서 스포츠와 삶은 서로 얽히기 마련이다. 그런데 그 얽힘이 때로는 극심한 혐오와 분노를 일으킨다. 생활인이 선수를 꼭두각시로 부리는 경우, 더 일반적으로 말하면, 속세의 삶이 스포츠를 단지 허울로 써먹는 경우를 생각해보라. 대표적인 예로 승부조작과 스포츠 권력 농단이 있다.

선수는 규칙이 허용하는 한에서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승리를 추구해야한다. 이것은 스포츠의 철칙이다. 그런데 각종 압력에 밀려 일부러 져주는 선수들이 있다. 압력의 출처는 코치나 협회일 수도 있지만, 요새 큰 문제로 떠오르는 승부조작 브로커와 그의 유혹에 넘어가는 선수 본인일 수도 있다. 종목을 막론하고 고등학교 선수 중에 대회 예선에서 만난 선배에게 져주라는 코치의 지시에 반발할 수 있는 선수는 대한민국에 별로 없다고 본다. 승부조작 브로커에게 협조하는 모험은 자칫 선수 생명 종결로 이어질 수 있으므로 대개 언감생심이겠지만, 손에 쥘 수 있는 금액이 얼마냐에 따라서 그 유혹은 매우 강렬할 것이다.

스포츠 권력 농단에 대해서는 따로 보충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최근 불거진 케이스포츠 재단 사태를 돌이켜보라. 이건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왕서방이 버는 수준이 아니라, 곰은 그냥 바깥에서 눈만 멀뚱멀뚱하고, 왕서방은 금고 안에서 돈을 자루에 퍼 담는 형국이다.

스포츠와 삶의 얽힘은 불가피하다. 더구나 때로는 그 얽힘이 벅찬 감동을 자아낸다. 가난을 딛고, 심지어 장애를 딛고 정상에 오른 선수들을 생각해보라. 체조선수 양학선의 어린 시절을 지배한 가난과 세상에서 아무도 따라할 수 없는 그의 뜀틀 연기를 나란히 놓고 음미해보라. 스포츠가 삶을 제압할 수는 없겠지만, 어느 한 순간, 이를테면 체조선수의 몸이 가장 높은 허공에 뜬 순간이나 탁구선수가 커트로 받아낸 공이 다시 네트를 넘는 순간, 우리는 삶을 제압한 것처럼 보이는 스포츠에 감동하는 듯하다.

거꾸로 스포츠와 삶의 얽힘이 악취를 풍기는 것은 속세의 힘이 스포츠를 완전히 제압할 때다. 칸트의 가르침에 빗대어 말하면, 스포츠가 단지 수단일 때, 속세의 힘에 점령된 식민지일 때다. 스포츠가 지저분한 삶으로부터 격리된 성역이기를 바라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스포츠와 삶은 얽힐 수밖에 없다. 스포츠는 이런저런 방식으로 수단이 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단지 수단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 칸트의 지혜를 돌이키자. ‘스포츠를 단지 수단으로 대하지 말고 항상 또한 목적으로 대하자.’ (월간탁구 2017년 5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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