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직지심체요절 VS 구텐베르크

우리나라 사람은 최초의 ‘금속 활자’ 하면 제일 먼저 고려 시대에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을 떠올린다. 그러나 세계사 속에서‘직지심체요절’은 별다른 인정을 받지 못했고, 그보다 78년이나 뒤늦게 만들어진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만 집중 조명을 받고 있는 현실이다. 이는 두 금속 활자가 불러온 사회적 파장의 범위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큰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

▲ 구텐베르크

새 밀레니엄을 코앞에 두고 있던 1999년, 미국의 유명 잡지 <라이프>는 지난 천 년 동안 인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100대 사건을 선정한 일이 있다. ‘인류의 달 착륙’,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루터의 종교개혁’, ‘나침반과 화약의 사용’ 등 모두가 알만한 인류사속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이 상위권을 차지한 가운데 단연 1위로 꼽힌 것은 ‘구텐베르크의 성경 인쇄’였다. 
전구를 발명한 사람이 에디슨이 아닌 것처럼 구텐베르크(1397?~1468) 역시 인쇄술을 처음 발견한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에디슨이 수많은 연구를 통해 전구를 상용화할 수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를 이용하여 인쇄술의 혁신을 일으키며 성경을 대량으로 인쇄, 제작하는 일에 성공했다. 책을 대량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해졌다는 것은 곧 지식의 확산을 뜻한다. 지식의 확산은 종교개혁, 르네상스, 산업혁명, 신대륙 발견 등의 일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니 <라이프>가 선정한 다른 수많은 사건은 결국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의 발견이 불러온 결과물이었다. 
 

▲  ‘구텐베르크 성경’. 모든 페이지가 42행으로 구성되어 있어 ‘42행 성경’이라고도 부른다. 그 외에도 구텐베르크는 금속 활자를 이용해 ‘도나토스’, ‘36행 성경’, ‘카톨릭콘’ 등을 인쇄했다. 


독일 마인츠에서 태어난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부친은 조폐국에서 금화 제조를 했다고 전해진다. 동전 모양이 새겨진 펀치로 금을 때려 금화를 제조했던 당시의 방식은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견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에 흔하게 볼 수 있었던 포도주와 기름을 짜는 압착기(press) 역시 활판을 인쇄기에 넣고 활자를 찍어내는 방식에 큰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영어로 인쇄나 언론을 뜻하는 단어인 프레스(press)가 여기에서 차용되었을 정도다. 그러나 사실 구텐베르크가 금속 활자를 만드는 과정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출생연도도 정확하지 않고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을 처음 사용한 시기 역시 추정만 하고 있을 뿐이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인쇄술을 연구했던 그는 1435년경에 고향인 마인츠로 돌아와 인쇄소를 차렸다. 그리고 1450년경부터 그동안 연구한 인쇄술을 이용하여 ‘구텐베르크 성경’을 제작한다. 총 2권, 1,272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제작된 책들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동안 글씨를 일일이 베끼는 필사를 통해 만들어졌기에 특정 계급의 사치품일 수밖에 없었던 고가의 책,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지식이 모든 사람의 것이 되는 순간이었다.


‘직지심체요절’은 대한민국만 안다?

금속 활자를 이용한 인쇄술의 발견이 지난 천년 사이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고는 하지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세계 최초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먼저 고려 사람이었던 이규보(1168~1241)의 시문집 ‘동국이상국집’에는 1232년에 금속 활자를 이용해 ‘신인상정예문발미’라는 책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타깝게도 이는 그저 기록만 남아있을 뿐 실체는 전해지고 있지 않지만 ‘직지심체요절(원래 제목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 이하 직지)’은 상황이 다르다. 직지는 상, 하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책의 하권이 온전한 모습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소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한말, 세계 열강들이 조선에 물밀 듯 들어오는 과정에서 프랑스의 외교관이었던 플랑시가 우리나라의 고서적과 미술품들을 사들였고 그 속에 직지가 포함되어 있었다. 직지는 1911년, 프랑스에서 경매를 거쳐 골동품수집가 앙리 베베르에게 넘어갔는데 그가 세상을 떠나면서 이를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기증은 받았지만, 프랑스인들에게 낯선 한자로 만들어진 이 책은 당시 동양에서 흘러들어온 다른 책들과 별 차이가 없어 보였을 것이다. 결국, 도서관 측은 직지를 기증받음과 거의 동시에 서고 깊숙이 처박아두고 말았다. 
 

▲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는 ‘직지심체요절’ 인쇄본. 직지는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로서의 가치는 인정받고 있지만 인쇄술의 완성도 면에서는 구텐베르크보다 한참 뒤쳐져 있다. 


직지가 다시 세상에 나오게 된 것은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 일했던 박병선 박사 덕분이었다. 서울대학교 졸업 후 1955년에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던 그녀는 그곳에서 역사학, 종교학 박사 학위를 받았고 1967년부터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연구원으로 근무하게 된다. 사실 그녀는 프랑스로 유학을 떠날 때부터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이 약탈해간 외규장각조선왕실의궤를 찾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국립 도서관에서 일하면서도 시간이 날 때마다 서고를 뒤지는 것은 물론 프랑스 전역의 도서관, 고서점을 찾곤 했다. 그런 그녀에게 서고 깊숙한 곳에 파묻혀있던 책 한 권이 발견되는데 그것이 바로 직지였다. 무엇보다 직지의 마지막 장에는 친절하게도 ‘1377년 7월 청주 흥덕사에서 쇠를 부어 만든 글자로 찍어 배포했다(宣光七年丁巳七月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는 내용까지 적혀있었다. 이는 놀라운 발견이었지만 객관적으로 인정받기는 쉽지 않았다. 프랑스는 직지의 가치를 외면하며 세계 최초의 금속 활자가 동양의 작은 나라가 아닌 서양에서 만들어졌다고 믿고 싶어 했다. 이에 박병선 박사는 직지의 가치를 밝혀내기 위한 고증 작업을 시작했고 결국 1972년 파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 도서의 해’ 기념 전시회에 직지를 출품하면서 직지가 가장 오래된 금속 활자본이라는 인정을 얻어냈다. 그리고 2001년에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최고(最古)가 곧 최고(最高)는 아니다

이쯤에서 의문이 드는 점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인류사에 그토록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에 비해 직지로 상징되는 고려 시대의 금속 활자는 왜 그대로 사장되고 말았는가 하는 것이다. 구텐베르크보다 78년이나 먼저 금속 활자를 이용해 직지를 제작했지만, 유럽에서와 같은 혁명적인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심지어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권에서는 19세기 중엽까지 목판으로 책을 만드는 일이 계속되었다. 동양권에서의 책은 지식의 보급과 공유를 위한 것이라기보다 문서로서 보관의 목적이 더 컸기 때문인데, 실제로 당시 금속 활자를 이용해 한 번에 만든 책이 많아야 수십 권에 불과했다. 그러나 사실 더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한자문화권에 속해 있었다는 것이다. 26개의 알파벳으로 구성된 서양 문자에서 활자판을 구성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겠지만,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한자를 일일이 금속으로 주조해서 활판에 끼워 맞추는 일은 목판을 새기는 일보다 훨씬 복잡했다. 그래서였는지 직지의 경우도 목판과 금속 활자, 두 종류로 제작되었고 현재 온전히 남아있는 목판본을 통해 직지가 원래는 상, 하권으로 구성되었으며 프랑스 국립 도서관에서 보관 중인 금속 활자본이 그 중 하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직지 이후 인쇄기술의 진전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았다. 수천 자의 한자들을 금속으로 하나하나 주조하고, 그것을 인쇄판에 일일이 끼워 고정시키는 등의 일은 숙련된 기술자들이 목판을 새기는 것보다 시간적으로나 금전적으로나 훨씬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실 구텐베르크가 역사적 인정을 받는 것은 금속 활자 그 자체가 아니라 활자를 활판에 고정하는 기술, 잉크를 인쇄판에 압착해 인쇄하는 프레스 기법, 금속 활자에 맞는 종이와 잉크의 개발 등에 있다. 결국 금속 활자는 우리 나라에서 수십, 수백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는 해도 그 기술의 완성은 구텐베르크의 손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봐야한다. 그렇기 때문에 <라이프지>에서도 분명하게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아닌 ‘구텐베르크의 성경 인쇄’를 중요한 사건으로 꼽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가능성이 있었던 고려의 금속 활자가 그대로 정체되고 말았다는 사실에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불러온 세상의 변화가 우리에게도 좀 더 일찍 찾아왔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일 것이다. 

<월간탁구 2017년 10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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