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0) / 전대호

심신일원론과 심신이원론

철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중대한 화두로 ‘심신문제’라는 것이 있다. 핵심 질문들은 이러하다. 정신과 물질은 별개일까? 별개라면 양자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시야를 좁혀서 인간에 초점을 맞추면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 몸과 마음은 별개일까? 별개라면 양자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실제로 이 문제는 정신과 물질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지만, ‘심신문제’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문제가 첨예하게 불거지는 자리는 우리 인간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어떤 관계냐 하는 것이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

심신문제가 중대한 화두로 떠오른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근대철학의 문을 연 데카르트는 몸과 마음이 아예 별개라고 주장했다. 그 배경에는 인간을 나머지 동물로부터 떼어놓는 오랜 전통이 있었다. 대표적으로 기독교가 그런 입장이지만, 이른바 ‘이성’을 가진 인간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예리하게 구분하는 전통은 고대 그리스 이래로 면면히 이어져온다. 이 전통을 일컬어 심신이원론이라고 한다. 몸과 마음이 각각 독립적으로 존재한다는 견해다. 데카르트는 이런 심신이원론의 대표자로 유명하다.

반대편에는 심신일원론이 있다. 이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몸과 마음은 하나라고 주장한다. 심신일원론의 대표자로 스피노자를 꼽을 수 있다. 데카르트(1596년생)보다 겨우 한 세대 어린 스피노자(1632년생)가 정반대의 견해를 들고 나왔다는 점은 얼핏 놀랍게 보이지만, 그만큼 심신문제가 까다롭다는 방증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 문제에 심신이원론으로 답하든, 아니면 심신일원론으로 답하든 간에, 곧바로 강력한 반격이 들어오는 것을 피하기 어렵다. 물론 요새는 지식계 전체에서 자연과학이 가장 큰 권위를 누리는 시절이다 보니, 심신일원론이 더 우세한 듯하다. 자연과학은 물질과 에너지 이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물질과 에너지에서 나온다. 감정, 상상, 생각, 가치판단, 예술적 창조성, 종교적 체험을 비롯한 모든 정신적인 것도 1.4킬로그램짜리 물질덩어리인 뇌에서 나온다. 이런 자연과학과 심신일원론은 서로 잘 어울린다.
 

▲ 몸 따로 마음 따로! 심신이원론은 훈련 중인 선수가 날마다 마주하는 현실이다. 뒤셀도르프 세계선수권대회를 준비하던 국가대표 서효원의 모습.

몸 따로 마음 따로? 스포츠의 맥락에서

그럼 심신이원론은 고루하며 비과학적인 착각에 불과할까?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듯하다. 데카르트는 어리석은 심신이원론을 고집한 근대철학자로 비판당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스피노자는 심신일원론이라는 통찰로 시대를 앞서간 위대한 인물로 찬양되곤 한다.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의 우열은 정말로 그처럼 명명백백하게 가려진 것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여전히 심신이원론은 최소한 심신일원론만큼 설득력이 있다.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문제에 답하기보다 문제를 이해하기일 때가 많다. 스포츠에서도 마찬가지 아닐까? 백핸드 커트는 잘 되는데 유난히 포어핸드 커트에서 실수가 잦은 것이 문제라면, 해결이 시급하더라도 그보다 먼저 문제를 꼼꼼히 살펴야 한다. 발놀림과 중심 이동에 치우침이 있는 것이 아닐까? 손목을 더 젖힌다거나 팔 동작을 더 빠르게 한다거나 하는 해결책은 임시방편으로 유효할지 몰라도 오히려 장기적으로는 몸의 균형을 깨뜨리는 독일 수 있다.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을 스포츠의 맥락에서 좀 더 접근해보자.

간단히 말해서 심신이원론은 훈련 중인 선수가 날마다 마주하는 현실이다. 선수의 몸은 늘 마음을 따라주지 않는다. 필자가 팔팔한 20대였을 때 최고의 댄스가수는 김완선, 최고령에 가까운 가수는 김정구였다. 그 시절에 “마음은 김완선인데, 몸은 김정구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었다. 바로 이것이다. 디스코텍에서 멋지게 춤추고 싶은 사람도 그렇지만, 특히 스포츠 선수는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상황을 하루에도 셀 수 없이 경험한다. 마음은 늘 마롱인데, 몸은 역시나 약하고 부정확한데다가 허점투성이다. 이 같은 몸과 마음 사이의 간극은 한편으로 비극적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선수를 훈련에 매진하게 만드는 희망의 종소리이기도 하다. 저만치 앞서 있는 마음이 몸을 끌어당긴다. 몸까지 정영식이 되고 서효원이 되기 위해서, 선수들은 매일 양동이에 가득 찰 만큼의 땀을 쏟는다. 그들은 ‘심신이원론’이라는 단어는 모를 수도 있겠지만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상황만큼은 누구보다도 잘 안다. 이런 의미에서, 훈련 중인 선수는 심신이원론자이며 그러해야 마땅하다.
 

▲ 그날이 오면! 심신일원론적 환희의 순간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사진은 2017년 뒤셀도르프 세계선수권에서 선전한 이상수가 김택수 감독과 기쁨을 나누던 모습이다.

그 날이 오면!

그럼 심신일원론은 스포츠의 맥락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한마디로 이 견해는 코치의 요구와 선수의 꿈을 요약한 것과 같다. 모든 코치는 선수가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상황을 극복하기를 바라고 요구한다. 선수 역시 그런 심신이원론적 현실을 깨부수는 날을 꿈꾼다. 그날이 오면, 선수는 손에 쥔 라켓을 보면서 ‘이것은 나의 의지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선수의 의지가 마치 피처럼 라켓 속으로 들고 나는 날! 라켓이 그야말로 마음대로 움직이는 날! 몸과 마음의 구분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날! 그날에 선수는 자랑스럽게 심신일원론자로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코치는 심신이원론을 깨부순 선수를 안거나 업고 펄쩍펄쩍 뛰며 기쁨의 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런 심신일원론적 환희의 순간은 틀림없이 존재한다. 내가 의식하기도 전에 라켓이 먼저 공을 받아내고, 기회가 오자 내가 놀랄 만큼 단호하게 라켓이 스스로 드라이브를 거는 상황을 성실히 훈련하는 선수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주로 잘 풀리는 시합에서 그런 상황이 발생한다. 그럴 때는 라켓에게(말없는 몸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편이 승리에 이롭다.

그러나 차분히 묻자. 몸과 마음의 구분을 느끼지 못하는 순간이 오래 이어질 수 있을까? 마롱은 자기 몸의 완고함과 불완전함을 탓하는 일이 없을까? 당대 최고, 심지어 사상 최고의 선수라도 몸 따로 마음 따로인 상황, 곧 심신이원론적 현실을 훌쩍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훈련 중에는 말할 것도 없고, 시합 중에도 마음은 수시로 몸에서 벗어나 판세를 살피고 전략을 다듬어야 한다. 그러다가 다시 플레이가 시작되면, 마음은 몸과 하나가 되어 스트로크 동작에 실리고 공에 실려야 한다. 요컨대 선수는 심신이원론과 심신일원론을 오가야 한다. 그것이 현명한 삶의 방식이며, 그것이 곧 현실이다. (월간탁구 2017년 7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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