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1) / 전대호

군대문화의 그림자

어느 대학 캠퍼스에서 본 광경이다. 남녀 학생들이 4열종대로 교내 도로를 달린다. 체격을 보아하니 다들 체육대학생인 것이 분명하다. 대열의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마도 과대표나 동아리 회장인 듯한 학생이 구령을 붙인다. “하나! 둘! 셋! 넷!” 일사불란함을 위한 지시도 빼놓지 않는다. “발 맞춰, 발! 왼발! 왼발!” 어느새 저만치 앞서간 대열에서 “와!” 하는 함성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우두머리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생들은 평범한 트레이닝복을 입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연상하게 된다. 아직도 이런 풍경과 마주쳐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다.

우리 사회에 군대문화가 만연해 있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마 드물 것이다. 서열 중시, 특권 추구와 인정, 같은 패거리 챙기기와 다른 패거리 밀어내기, 겉만 그럴싸하게 꾸미기, 까라면 까기, 강자에게 순응하고 약자에게 잔인하기 등, 민주 시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온갖 병폐의 뿌리는 군대문화에 닿아있다고 할 만하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군대와 제정신이 아닌 군인정신. 군대를 경험한 사람 치고 군대에 다시 가는 꿈을 꾸다가 깨어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얼마 전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초등학교 학생이 체육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보고 몇 마디 묻다가, 그 아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수요일에 체육활동을 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왜 하필 수요일일까? 정확한 사정은 알 수 없으나, 필자는 그 학교의 수요일 체육활동이 군대의 전투체육과 무관하지 않다고 추측한다. 수요일에 체육활동을 하는 것은 대한민국 군대의 오랜 관행이다.

군대문화의 그림자가 가장 짙게 드리운 곳은 어디일까? 필자의 경험에 기초하면, 학교를 지목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은 퍽 달라진 것으로 알지만, 30여 년 전 중‧고등학교에서 선생은 소대장, 학생은 사병, 학년은 계급, 교장은 대대장, 체벌은 일상사였다. 운동장을 ‘연병장’이라고 부르는 선생도 적지 않았다. 이런 문화를 앞장서 퍼뜨린 과목을 꼽으라면 당연히 교련을 꼽아야 한다. 대놓고 학생을 소년병으로 훈련시키는 과목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체육도 빼놓을 수 없다. 필자는 2열 종대니, 4열 횡대니 하는 대열을 초등학교 체육 시간에 배운 것으로 기억한다. 선착순과 단체기합도 체육 시간에 처음 경험했지 싶다.
 

▲ 승리는 정당한 수단으로 얻을 때만 유의미하다. 마라도나의 ‘신의 손’은 스포츠에서의 반칙을 가장 극적으로 상징하는 장면으로 남아있다.

왜 체육이 군대문화의 숙주 노릇을 했을까?

이 대목에서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왜 체육이 군대문화의 숙주 노릇을 했을까? 이 문제는 과거에 국한되지 않는다. 앞서 어느 대학 캠퍼스의 광경을 묘사했지만, 지금도 체육과 스포츠는 군대문화에 감염되기 쉬운 취약지대로 남아있는 듯하다. 코치가 선수를 체벌했다는 이야기, 선배 선수가 후배 선수를 구타했다는 이야기, 이런저런 스포츠 협회를 특정 인맥이 주무른다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매년 소년체전마다 초‧중학교의 어린 선수들이 메달을 따낸 뒤 마음껏 기쁨을 표하기보다 지역 관계자 앞에 도열해서 거수경례를 하는 얼토당토않은 풍경은 여전히 우리 현실이다. 스포츠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대체 왜 이럴까? 스포츠와 군대문화는 운명적으로 얽힌 한 쌍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고 필자는 확신하지만, 문제를 차근차근 검토해보자. 실제로 스포츠와 군대는 서로 어울리는 구석이 있다. 열쇳말로 ‘승리 추구’와 ‘몸’을 들 수 있겠다. 군인과 선수는 승리를 추구한다. 또한 양쪽 모두 말이 아니라 몸으로 승부를 가른다. 그래서 양쪽 모두 때로는 몸을 혹사하면서까지 훈련하고 또 훈련한다.

하지만 명확하게 짚어야 할 차이점들이 있다. 군인에게 패배는 곧 죽음이지만, 스포츠 선수에게 패배는 다음번 승리를 위해 꿀꺽 삼켜야 할 약이다. 군인에게 승리는 상당한 정도로 수단을 정당화할 만큼 절실하지만, 선수에게 승리는 정당한 수단으로 얻을 때만 유의미하다. 승리를 위해 부당한 수단을 쓰는 것을 반칙이라고 한다. 설령 심판의 실수로 반칙을 쓴 선수가 승리하더라도, 그 승리는 두고두고 부끄러운 과거사로 남기 십상이다. 그 유명한 마라도나의 ‘신의 손’을 생각해보라. 명백한 고의적 핸들링으로 넣은 골을 마라도나는 과연 자랑스러워할까?
 

▲ 어린 선수들이 거수경례로 ‘이상한’예를 표하는 풍경은 여전히 우리의 웃픈 현실이다.

결별을 기다리며

몸과 관련해서도 꼭 짚어야 할 것이 있다. 어설픈 양반 문화 때문인지, 고도성장기 만연했던 출세욕 때문인지, 우리 사회는 정신 활동을 숭상하고 신체 활동을 얕잡아보는 경향이 강하다. 머리를 쓰는 일은 귀하게 대접받고, 몸을 쓰는 일은 천시 당한다. 평생 농사를 지어 손이 갈퀴처럼 된 아버지가 아들을 도시로 유학 보내면서 공부 열심히 해서 꼭 ‘펜대 굴리고 도장 찍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다. 정신은 특권과 상통하고, 몸은 노동과 상통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갑은 안타깝게도 노동이 아니라 특권이다. 이런 풍토는 어쩌면 이 글에서 규탄하는 군대문화, 몸보다 계급장을 중시하는 나쁜 군대문화의 토대일지도 모른다.

필자는 우리 사회가 정신을 존중하는 것에 아무 불만이 없다. 학문, 종교, 예술 등의 정신 활동은 과연 존중할 만하다.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는 예술작품을 무엇으로 대체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몸을 얕잡아보는 우리 사회의 경향은 필자를 심각한 고민으로 이끈다. 몸은 우리가 근본적으로 평등하다는 것을 일깨운다. 명치나 오른쪽 옆구리에 강한 펀치를 맞으면 누구나 상체를 오그리고 심하면 주저앉는다. 누구의 몸이든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런 몸을 얕잡아본다면,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평등을 외면하는 구태에 여전히 물들어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제 스포츠와 군대문화의 얽힘에 대해서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자. 무조건 이겨야 한다는 생각과 몸을 천시하는 분위기가 만연할 때, 스포츠는 군대문화로 물들기 쉽다. 반대로 수단의 정당성이 중시되고 몸이 존중받을 때, 스포츠는 군대문화와 결별하고 정의의 모범으로 자리매김할 것이다. 유럽 축구선수들은 대중의 인기를 누릴 뿐더러 진정한 존경도 받는다. 사람들은 축구선수를 소설가, 작곡가, 미술가와 대등한 예술가로서 존경한다. 우리 사회에서도 스포츠 선수가 그렇게 대접받는 날이 오기를 바란다. 그러려면 스포츠와 군대문화의 결별이 하루 빨리 이루어져야 한다. (월간탁구 2017년 8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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