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유치운동의 태동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유치운동은 1979년 2월 대한체육회 회장으로 박종규 씨가 취임하면서부서 태동했다. 당시 대한사격연맹 회장이던 박종규 회장이 1978년 서울에서 세계 사격 선수권대회(9.24 ~ 10.5, 태릉종합사격장)를 성공적으로 치른 뒤 올림픽도 서울로 유치할 수 있다는 자신을 얻은 결과였다.

서울 세계 사격 선수권대회는 비록 공산권이 철저히 외면, 불참했지만 단일 세계선수권대회로서는 사상 최대인 68개국 1500여명의 선수단이 참가한데다 한껏 축제무드를 달군 개.폐회식 행사와 짜임새 있는 대회 진행으로 국제 사격계를 감동시켰다.

대회기간 동안 내한했던 국제 사격계의 VIP들은 귀국한 뒤 한국은 올림픽도 유치할만한 저력이 있다는 찬사를 박정희 대통령과 박종규 회장에게 잇따라 보내옴으로써 박 회장의 대회 유치 구상을 일깨웠다.

이에 용기를 얻은 박 회장은 1979년 2월 대한체육회 회장직에 취임하자마자 조상호, 김세원 등 전직 대사를 부회장을 맞아 들여 스포츠 외교력을 강화하고 실무 연구반으로 전문위원을 설치하여 올림픽 유치에 대한 구상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해 3월, 대한체육회는 제24회 올림픽대회 유치에 관한 객관성 및 타당성을 검토한 끝에 유치건의안을 문교부에 제출하기에 이른 것이다.

 

▲ 올림픽 포스터-88년 올림픽을 서울에서!

유치방침의 확정

대한체육회의 건의안을 접수한 문교부는 정책적인 뒷받침을 위한 작업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로부터 3년 전 대통령 경호실장에서 밀려난 야인이었지만 여전히 박정희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있던 막강한 실력자인 박 회장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문교부는 이어 올림픽 유치에 필요한 경기장과 숙박시설 및 운송수단을 비롯하여 대회 유치에 따른 득실 및 가능성 등에 대한 좀 더 많은 보완자료를 제출하도록 대한체육회에 요구하는 한편 경제기획원, 외무부 등 관계부처의 의견을 청취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주 일본대사관을 통해 1964년의 도쿄 올림픽대회 관련 자료를 수집하여 문교부 자체적으로 다각적인 검토를 기하였다.

그 결과 문교부와 대한체육회는 국민소득의 측면에서 올림픽의 유치가 큰 무리가 아니라는 판단을 하게 되었다. 도쿄 올림픽대회(1964년) 당시 일본의 1인당 국민소득이 1,242달러이며, 한국 경제가 1,115달러였고, 1978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해마다 10% 안팎의 성장을 계속할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리 없이 올림픽대회를 치를 수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검토 자료를 근거로 문교부는 1979년 8월 3일,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유치문제를 국민체육진흥 심의위원회에 상정했고, 동 위원회는 안건의 중요성을 감안한 끝에 7인 소위원회를 구성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한 뒤 결정하기로 의결했다.

그 결과 당시 신현확 경제기획원 장관을 위원장으로 박찬현 문교부장관, 박동진 외무부 장관, 정상천 서울시장, 윤일균 중앙정보부 차장, 그리고 박종규 회장, 김택수 IOC 위원 등으로 구성된 소위원회가 1979년 8월 22일에 첫 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는 1978년 세계 사격선수권대회의 성과를 재검토한 뒤 과중한 국민부담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국민총회와 대 공산권 교류 및 대 북한 우위 확보를 위하여 올림픽 유치를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에 따라 국민체육진흥 심의위원회는 1979년 9월 3일 서면결의로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유치 계획을 의결했고, 그 해 9월 21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가 나왔다.

1979년 10월 8일 정상천 서울시장은 박종규 회장 등 소위원회의 위원들의 배석한 가운데 세종문화회관에서 내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19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를 우리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유치하기로 결정했다고 정식 발표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18일 뒤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10.26 사태의 발발로 위와 같은 올림픽 유치 운동은 원점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서울올림픽 대회 유치의 결단을 내렸던 박정희 대통령이 타계했고, 올림픽 유치 운동을 주도해온 박종규 회장이 정치적인 이유로 체육행정의 제2선으로 밀려났기 때문이었다. 또 올림픽 개최도시가 될 서울시는 물론 대한체육회 안에서도 올림픽 유치에 대한 소극론이 대두되었고,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이 이끄는 과도정부도 올림픽 대회의 유치에 회의적인 입장이었던 것이다.
 

▲ 79년 4월 푸에르토리코 상환에서 열린 올림픽연합협의회(ANOC) 창립총회 때. 당시 대한체육회 박종규 회장은 88년 올림픽의 서울 유치 준비를 위한 파티를 열었다.

 

정부방침의 재천명(再闡明)

1980년 9월 1일, 제11대 전두환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올림픽 유치 계획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제5공화국 출범 직후 대한체육회가 재가로 확정되었지만 정치적 혼란기를 겪으면서 흐지부지된 제24회 올림픽대회 유치계획에 대한 신임 전두환 대통령의 결심을 다시 받아내기 위한 작업을 들어갔던 것이다.

박종규 회장의 뒤를 이은 조상호 회장은 제24회 올림픽대회 유치계획에 대한 대한올림픽위원회(KOC)의 공식 의견조정을 위한 소위원회를 재구성하고, 1980년 9월 29일 그 첫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이날의 회의는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KOC 확대상임위원회에 상정하여 제론하기로 합의하였다.

1980년 11월 6일 소집된 KOC 긴급확대상임위원회는 제24회 올림픽대회 유치에 따른 타당성과 시의성(時宜性)을 검토한 끝에 올림픽 개최는 국가의 대외 이미지 개선과 대 공산권 외교에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할 것이며, 설령 유치경쟁에서 탈락하더라도 올림픽 유치 후보국으로서의 명예가 남는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리하여 KOC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 올림픽 유치신청서를 제출하기로 결정하고 문교부에 이를 건의하였으며 이규호 문교부 장관도 KOC의 결정에 전적으로 찬동하였다.
 

▲ 84년 7월 IOC 위원이 된 박종규 씨가 86년 4월 서울에서 열린 세계올림픽연합회 총회를 주재하기 위해 내한한 멕시코의 마리오 바오케스 라냐 회장을 영접하고 있다.

그러나 서울시측의 입장은 그 반대였다. 서울시측은 올림픽 유치의 최종결정은 정부가 검토, 판단해야 할 사항이나 서울시의 재정 등 제반여건을 감안할 때 88년 올림픽대회 개최시기까지 제반시설을 갖추기 어려울 것으로 판단되므로 제24회 올림픽대회를 유치할 수는 없다고 문교부에 통고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문교부는 서울시의 올림픽 유치 반대 주장도 첨부하여 올림픽 유치의 타당성 조사결과를 대통력에게 보고했다.

상황이 이에 이르렀을 때 전두환 대통령은 “전임 대통령이 결심하여 국내외에 공표한 중대 사항을 별다른 이유 없이 변경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 역사적인 사업을 추진해 보지도 않고 처음부터 패배의식 속에서 물러나서는 안된다.”고 유치결의를 밝혔다.

이렇게 대통령으로부터 강력한 올림픽 유치 지시를 받은 문교부는 KOC에 정부의 기본방침에 변동이 없으므로 서울시와 협의하여 올림픽 유치에 차질이 없도록 하고 ,IOC에 제24회 올림픽 대회 유치의사를 통보하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사태의 급진전을 맞은 KOC의 실무진은 스위스 로잔에 있는 IOC 본부의 모니크 베를리우 사무총장 앞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전문을 타전했다.

「KOC는 19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 개최 후보도시로서 서울시를 지지하기로 결정하였으며 문서에 의한 공식 신청서는 추후 적절한 시기에 제출하겠음」

그 뒤인 1980년 12월 4일 IOC는 한국의 수도 서울이 일본의 나고야시와 함께 제24회 올림픽대회의 공식 유치신청 도시가 되었음을 발표했다.

 

유치신청서의 제출

1980년 12월 25일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는 150페이지에 이르는 질문서를 대한올림픽위원회에 보내면서, 질문에 대한 답변서와 유치신청서를 1981년 2월 28일까지 제출하라는 공한을 함께 보내왔다.

동 질문서는 질문항목도 일반사항 70페이지에 기술사항 80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거기에는 서울시가 제24회 올림픽대회를 개최하기 위해 이미 확보한 시설과 앞으로 건설한 계획인 경기장, 대회경비 및 대회운영에 관한 총괄계획 등 갖가지 질문을 수록해 놓고 있었다.

제출마감시한이 70여일밖에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방대한 자료수집이 소요되는 답변서를 작성한다는 것은 대단히 힘든 작업임에 틀림없었다. 문교부는 서울시와 대한체육회 관계자들과 함께 올림픽 유치대책 협의회를 긴급히 구성하여 유치신청서 작성을 위한 합동작업반 구성과 예산확보 문제 등을 협의했다.

그런데 서울시 측은 여전히 올림픽 유치에 강한 회의감을 나타내면서 대한체육회 측의 합동작업 제의에 책임감 있는 참여를 회피하는 자세를 취했다. 결국 박성규 문교부 체육국장이 실문작업반의 최종책임을 맡고 문교부와 서울시의 사무관 1명씩이 매일 오후 KOC 전문 위원실에 나와 합동 근무하는 절충안이 채택되었다.
 

▲ 서울의 올림픽 개최권 획득과 88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견인차 역할을 한 김운용 박사와 사마란치(1988년 로잔에서 열린 CAISF 총회에서).

올림픽 유치신청서 작업반은 해를 넘겨 1981년 1월 6일에야 문교부, 서울시, KOC의 실무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작업은 거의 전적으로 KOC의 전문위원들에 의해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KOC 실무진들이 40여 일간의 철야작업 끝에 완성한 답변서는 영어판 190페이지와 불어판 160페이지나 되는 엄청난 분량이었다. 이것은 IOC 요구대로 300권의 책으로 인쇄를 끝냈을 때는 유치신청 마감일을 불과 4일 앞둔 1981년 1월 24일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방대한 부피의 답변서와 유치신청서를 유송할 경우 2월 28일까지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까지 도착시킬 수 없었다. 그래서 서울시와 KOC의 실무자 3명이 직접 운송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었다.

나고야 대표단이 제출한 신청서류는 서울의 그것보다도 3분의 1이 채 못 되는 분량이라고 했다.(대한체육회 70년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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