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올림픽 개최 경비의 증가

1981년 2월 24일 오스트레일리아의 멜버른이 올림픽 유치의 포기를 공식 발표하고, ‘올림픽 영구개최론’을 들고 나왔던 그리스의 아테네가 신청서의 제출을 포기한 때문에 88년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유치 경쟁은 한국의 서울과 일본 나고야의 대결로 압축ㄱ되어 유치의 전망도 한결 밝아졌다.

그러나 한국의 올림픽 유치운동은 유치 신청서를 낸 직후부터 대내적인 문제로 인해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올림픽 개최 답변서를 작성한 KOC 전문위원 팀이 질문사항을 면밀히 재검토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오차를 발견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올림픽 개최경비를 당초 대통령에게 보고했던 2500억원(미화 3억 7000만 달러)의 2.5배나 되는 6200억원(미화 9억달러)으로 대폭 증액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같은 오차는 시설 투자액의 산출에 문제가 있어서 빚어진 것이었다. LOC 실무진이 IOC와 국제경기연맹(ISF)이 제시한 경기장 시설 기준을 재검토한 결과 당시 서울 잠실에 건설 중이던 올림픽 주경기장 외에도 20개의 경기장을 새로 건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내려야 했던 것이다.

이처럼 올림픽 개최 경비가 대폭 증액됨에 따라 문교부는 1981년 3월 18일 올림픽 대회 유치 대책안을 성안하여 관계부처 실무자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는 국무총리실의 적극 유치 주장과 경제 기획원측의 재검토 의견이 맞서 의견 조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올림픽대회 유치 대책안은 실무자 회의가 아닌 국무회의에 상정하여 심의, 확정 시키기로 합의할 수밖에 없었다.
 

▲ 서울올림픽 유치단을 진두지휘한 인연으로 82년 3월 초대 체육부장관이 된 노태우 장관이 4월 내한한 베네주엘라 이사본 폰세 IOC 위원과 환담하고 있다.

 

내각의 올림픽 유치 공방

1981년 4월 16일, 신병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비롯한 노신영 외무, 이규호 문교, 이광표 문공부 장관, 박영수 서울시장, 대한체육회 조상호 회장, 김택수 IOC 위원 등이 참석한 가운데 남덕우 총리 주재로 올림픽 유치대책회의가 열렸다.

대한체육회의 주무 부처인 문교부의 이규호 장관이 올림픽 대회 유치 신청 경위를 설명하자 이에 대해 경제기획원 장관과 서울시장이 과도한 재정 부담을 이유로 올림픽 유치 반대의 입장을 표명했다. 결국 회의는 국내외의 어려운 경제 여건과 막대한 개최경비 및 유치 경쟁의 희박한 승산 등이 강조되면서 대통령의 결심을 다시 한 번 받아내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제1차 회의 뒤 열흘만에 열린 제2차 회의에서는 올림픽 유치 찬성 측과 반대 측의 열띤 설전 끝에 “명분 있는 후퇴론을 찾자”는 주장이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하지만 그 뒤 1981년 5월 16일에 열린 제3차 올림픽 유치대책 각료회의는 2차 회의 때와는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제2차 회의에서 제기된 명분 있는 후퇴의 길을 찾을 수 없음이 확인된데다 대통령의 확고한 유치의지가 전달된 까닭이었다.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한국이 60년대 후반에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한 사례를 들면서 대통령의 보증서까지 첨부해서 제출한 올림픽 유치 신청을 뚜렷한 명분 없이 철회한다면 국제적인 신용도가 추락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하고 일본과 표 대결을 벌이는 길밖에 없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이광표 문공장관도 표 대결을 위해 유치활동을 벌이는 것이 한국의 대회 홍보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대한체육회 조상호 회장은 일본과 표 대결을 벌이려면 일본을 이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체면이 설 만큼 서울 쪽의 찬성표가 나올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유치활동을 벌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회의는 결국 문교부가 제안한 올림픽 유치 추진위원회 구성안을 채택하고 재외공관을 통한 유치활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문교부의 올림픽 유치대책 재검토

세 차례에 걸친 올림픽 유치 대책 각료회의가 끝난 뒤에도 내각 안의 분위기는 경제 각료들을 중심으로 한 올림픽 회의론이 우세하자 이규호 문교부 장관을 1981년 5월 하순부터 내각 안에 호의적인 여론을 조성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에 유학성 국가안전 기획부장이 적극 협력했고 외무, 문공장관은 올림픽 유치에 실패하더라도 유치활동은 활발하게 추진하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데 인식을 같이했다.

당시 대부분의 스포츠 전문가들은 서울이 나고야에 비해 결정적으로 불리하다고 전망했다. 무엇보다도 서울이 분단국가의 수도여서 정치적인 약점을 지닌데다 북한을 중심으로 한 공산권 및 그 동조세력의 강력한 반대가 예상될 뿐만 아니라 국제종합스포츠대회를 개최해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대회 운영능력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나왔다. 이에 비해 일본은 국제 스포츠 기구의 임원을 많이 확보하고 있는 강점을 이용하여 올림픽 유치 신청전부터 적극적인 유치활동을 펼쳐 왔었다.

그런 반면 시설과 여건의 측면에서는 서울이 나고야보다 훨씬 우세한 점을 널리 알리고 미주와 유럽 쪽에 팽배해 있는 경제대국 일본에 대한 반감을 활용한다면 승산이 그리 없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문교부의 판단이었다.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3차 까지의 올림픽 유치 대책 각료회의 결과를 참조하여 올림픽 대회 개최 경비를 수정하고 올림픽 유치에 따른 득실과 전망 등을 세밀하게 분석한 뒤 종합 보고서를 작성하여 1981년 6월 대통령께 보고했다.
 

▲ 서울올림픽 유치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회장(오른쪽 세 번째)이 바덴바덴 IOC조직위 사무실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확고한 정부방침

전두환 대통령은 정부의 경제 각료들이 올림픽 유치에 반대하는 입장임을 알고 있었으나 문교부장관으로부터 종합보고를 받자 유치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국무총리 주재로 세 차례 열린 유치대책 각료 회의에서 사실상 보류로 결정되었던 올림픽대회 유치 활동이 다시 활로를 찾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문교부는 KOC에 체육인을 통한 유치교섭을 폭넓게 펼치도록 지시하고, 문교부 체육국의 실무진에게는 유치활동의 추진상황을 점검하면서 IOC 위원들의 동향을 개인별로 추적하여 유치전망을 타진토록 했다. 그러나 경제 각료들과 서울시가 여전히 올림픽 유치에 미온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므로 유치활동은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지 못한 채 외무부의 재외공관을 통해 펼치는 선을 넘지 못했다.

 

세계올림픽 총연합회 조사단의 내한

스위스 로잔의 IOC 본부는 1981년 3월 22일자 전문으로 IOC와 세계올림픽 총 연합회(ANOC) 및 국제경기연맹(ISF)의 조사단 파견계획을 KOC에 통보하고 조사단이 내한할 때 서울시의 기존 스포츠시설과 숙박시설을 비롯한 도로교통망, 경기장 건설현황, 언론관계 시설 등에 대한 자료를 준비 제출해줄 것을 요청해왔다. 이 같은 IOC의 요구에 대한 준비 작업은 올림픽 유치신청 도시인 서울시가 맡아서 처리해야 할 사항이었으나 서울시의 무관심으로 KOC가 대신 떠맡을 수밖에 없었다.

1981년 3월 28일, 미국 국가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 돈 밀러와 영국 국가올림픽위원회 사무총장 리처드 펄머가 ANOC의 조사단원으로 내한하였다. KOC로서는 돈 밀러가 맨 먼저 서울을 방문하게 된 것이 다행이었다. 그는 1954년 주한미군에 배속되어 2년 동안 한국에서 근무한 일이 있었다.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있고 스탠드조차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서울운동장 야구장에서 게임까지 한 적이 있었던 밀러는 25년 만에 다시 본 서울의 눈부신 발전상에 오직 경탄할 뿐이었다.

KOC 관계자의 안내로, 건설 중인 올림픽 주경기장과 태릉 국제사격장 및 선수촌 등을 둘러보고 지하철도의 시승까지 하는 등 사전조사단원으로서의 임무를 빈틈없이 수행한 밀러 일행은 서울의 무서운 추진력에 감탄하고 올림픽 개최능력을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서울과 나고야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귀국한 이들 2명은 1981년 4월 28일 IOC에 두 도시의 올림픽 개최능력에 관한 조사결과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과 나고야는 IOC의 요구사항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했음이 입증되었다. 서울시는 대도시로서 놀랄 만큼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데 반해 나고야 시는 비교적 작은 도시로서 정비를 잘 되었지만 시골풍경이 많았다. 스포츠 시설은 서울시가 대부분의 경기장을 건설 중에 있는 반면 나고야 시는 제반시설은 그 내용이 우수하나 아직 계획단계에 불과했다. 숙박시설의 경우 서울시는 별로 심각한 문제가 없는데 비해 나고야 시는 전망이 밝지 못했다.⟧

 

IOC 조사단의 내한

ANOC 조사단이 다녀간 다음날 IOC 조사단이 내한했다. 오네스티 이탈리아 IOC 위원, 제임스 워럴 캐나다 IOC 위원, 바스케스 멕시코 IOC 위원 등 6명으로 짜여진 조사단 일행은 각종 시설을 둘러보면서 서울시의 올림픽 개최 여건이 잘 갖추어진데 대해 만족을 나타냈다.

특히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 당시 조직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바스케스 IOC 위원은 10만 명 수용의 주경기장 외에 서울 외곽 둔촌동의 올림픽 공원 안에 또 하나의 주경기장을 건설하려는 계획은 예산의 낭비이므로 재검토할 필요하가 있다고 충고까지 해주었다.

 

국제경기연맹 조사단의 내한

IOC 조사단이 다녀간 2개월 뒤인 1981년 6월 9일 네덜란드의 아드리안 폴렌 국제육상경기연맹 회장이 국제경기연맹(ISF) 조사단원으로 내한했다. 주고 경기 기술적인 사항을 중심으로 한국의 올림픽 대회 개최능력을 조사한 폴렌 회장은 조상호 KOC 위원장에게 유치활동을 좀 더 효과적으로 벌일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진지하게 충고해주었다.

1951년부터 3년간 한국 부흥위원단(UNKRA)에 관계하면서 한국에 체재했던 폴렌은 서울의 경이로운 발전에 감탄해 마지않으면서 뉴욕이나 도쿄에 비교해도 손색없는 현대도시인 서울의 모습을 전 세계에 잘 알리면 유치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권유했다.

특히 폴렌 회장과 만찬을 함께 한 정주영 유치 준비위원장은 정부의 올림픽 유치방침만 확정된다면 개인적으로라도 유치활동을 위한 경비 지원을 하겠다고 밝힘으로써 체육계의 유치 활동 분위기를 크게 고조케 하였다.

 

재외공관의 활동

1981년 5월 25일 외무부는 IOC 위원이 거주하는 나라의 상주공관에 올림픽 유치 교섭을 벌이도록 지시하고 교섭상황과 IOC 위원들의 동향을 계속 보고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같은 훈령에 따라 재외 공관원들이 펼친 외교활동은 그때까지 한국의 올림픽 대회 유치 진의를 의심하던 수많은 IOC 위원들에게 유치의사를 명백히 밝혔을 뿐만 아니라 각종 정보의 수집, 분석 및 설득작전 등으로 한국의 올림픽 유치가능성을 크게 증대케 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 84년 싱가포르 아시안컵축구대회 기간 중의 함자 IOC위원(오른쪽). 그는 친한파로 바덴바덴 IOC 총회 때 서울의 올림픽 유치작전을 적극 도와주었다.

특히 체육인들의 교섭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지역의 IOC 위원들에 대한 교섭은 전적으로 재외공관원들의 활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초기에는 외무부의 훈령에 대해 일부 공관에서 성의 없는 대응을 보이기도 했으나 8월까지 세 차례나 연거푸 훈령이 내려가자 성의를 다하여 유치활동을 펼쳤다. 이러한 재외공관의 노력은 막판 대역전극의 든든한 바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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