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환의 백과사전

 


유치활동의 중간점검

1981년 8월 1일 문교부는 그때까지 외무부의 재외공관과 체육인을 통해 벌인 올림픽 유치 활동의 성과를 중간 점검했다. 그때까지 한국 측이 접촉한 60여명의 IOC 위원 중 5명이 한국을 적극 지지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지원표명 16명, 호의적 고려 16명, 중립 18명으로 분석되었다.

한국 측이 접촉한 IOC 위원들의 대체적인 반응은 서울이 시설과 도시 여건에 비추어 나고야보다 우수하나 공산권과 국교가 없는데다 전쟁의 위험이 있다는 것이 약점이라는 의견들이었다. 특히 나고야가 1979년 9월부터 1981년 5월까지 1년 9개월 동안 세계 각국의 IOC 위원들을 방문하거나 일본으로 초청하여 환대하면서 꾸준히 득표활동을 벌인데 비하여 서울 쪽은 유치신청 후 유치교섭과 홍보활동이 미미하여 한국의 개최의사를 의심하는 인사도 적지 않았다.

지역적으로 보면 미주지역과 대양주의 IOC 위원들은 대체로 서울 쪽에 호의적이었으나 공산권과 유럽 및 중동지역 IOC 위원들은 나고야 쪽으로 기운 듯 했다. 아프리카와 남미지역 IOC 위원들은 태도를 분명히 밝히지 않고 있었다. 그동안 한국이 미온적인 유치활동을 편 것을 감안하면 IOC 위원들의 반응은 예상 외로 좋은 것으로 나타났다.

21명의 위원들이 서울 지지태도를 밝힌 이상 일본 나고야 시와 표 대결을 벌여도 망신당하지 않을 것에 대한 포섭공작을 활발히 펼치고, 9월의 바덴바덴 IOC 총회 때 서울의 월등한 개최여건을 알릴 경우 나고야 시와 백중한 경쟁이 가능하다는 전망을 하게 되었다.

이에 용기를 얻은 이규호 문교부 장관을 그동안의 올림픽 유치활동 성과를 중간 점검한 결과를 1981년 8월 10일 열린 제4차 올림픽 유치대책 각료회의에 보고하고 유치교섭을 적극적으로 벌여야 한다고 역설했다. 남덕우 총리가 주재한 이날의 회의는 문교부 측의 고무적인 보고 덕택에 모처럼 밝은 분위기 속에 진행되었다.

막대한 재정 부담을 이유로 올림픽 유치에 부정적인 견해를 보여 온 경제 각료들의 태도도 한결 부드러워져서 이날 회의는 긴 시간의 토론을 거치지 않고도 특별대책반 구성과 홍보 전시관의 설치 및 홍보영화, 책자, 기념품 제작 등 바덴바덴 IOC 총회의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날 회의는 1986년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의 유치에 나쁜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올림픽 유치활동을 펴나간다는 결론을 내림으로써 올림픽 유치활동의 한계선을 분명히 그었다. 그렇더라도 올림픽 유치활동을 정상적으로 펴나가기로 정부방침이 확정된 것은 큰 변화였다.

 

특별대책반의 구성

1981년 8월 10일의 제4차 올림픽 유치대책 각료회의의 결정에 따라 김동휘 외무부 차관을 책임자로 한 유치특별대책반이 구성되어 그 첫 회의가 8월 22일 외무부 회의실에서 열렸다. 국무총리실 행정조정관, 외무부 정보문화국장, 문교부 체육국장 및 문공부, 서울시 KOC 관계자들이 참석한 이날 회의는 외무부가 작성한 제24회 올림픽 및 제10회 아시아경기대회 유치를 위한 종합대책을 집중 토의한 끝에 유치특별대책반을 도울 실무대책을 관계부처 과장급으로 구성, 운영키로 합의했다.

또한 이날 회의가 관계부처별로 업무를 분담하여 효율적으로 추진키로 결정함에 따라 외무부는 유치계획의 작성과 활동을 총괄하고, 문교부는 실무대책반 운영을 위한 인력을 지원하며, 문공부는 대외 홍보를 위한 책자의 제작 및 배포를 담당키로 했다.

정부방침의 급선회

1981년 8월 10일에 열린 정부의 제4차 올림픽 유치대책 각료 회의를 계기로 서울올림픽 유치활동은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었다. 3월부터 5개월에 걸쳐 계속된 내각 안의 올림픽 유치찬반 공방전이 찬성파의 판정승으로 마무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24회 올림픽 대회를 반드시 서울로 유치하겠다는 신념의 결여로 유치활동은 체육계의 여망대로 적극적이고 강력하게 펼쳐지질 못하고 형식적인 선을 탈피하지 못했다.

바덴바덴 IOC 총회를 불과 한 달 앞둔 8월 하순,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일본 나고야 시로 기운 대세의 반전을 위해서는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결연한 올림픽 유치 결심을 받아낼 필요성을 절감했다. 바로 그즈음 노태우 제2정무장관은 나름대로 문교부, 외무부, KOC로부터 그동안의 유치활동 및 IOC 위원들의 동태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 결과 “앞으로 한 달 동안 거국적인 유치활동을 펼치면 일본 나고야시를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밝은 유치전망을 전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1981년 9월 1일, 이 문교부 장관도 청와대를 방문하여 올림픽 유치전망이 호전되어 적극적인 유치활동을 벌이면 일본 나고야 시와 백중세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밝힌 보고서를 제출했다. 내각 안에서 올림픽 유치 문제를 둘러싼 찬반공방전이 지루하게 벌어지고 있던 지난 몇 달 동안 확고한 의사표시를 유보하고 있던 전 대통령은 이날 제24회 올림픽은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서울로 유치해야 한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였다.

이 문교부 장관의 보고가 있은 직후 전 대통령은 올림픽 유치 활동을 거국적으로 전개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하고 유치활동의 총 사령탑으로 노태우 제2정무장관을 지명했다.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노장관은 1981년 9월 4일 올림픽 유치활동을 위한 비상대책 회의를 소집했다. 이 문교부 장관, 노신영 외무부 장관, 박영수 서울시장과 전상진 KOC 부위원장 등이 참석한 이날 회의는 IOC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범국가적인 차원에서 동원하여 유치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기로 의견을 모았다.

▲ IOC 집행위원회 회의장면.

 

유치대표단의 구성

노태우 장관이 지휘봉을 잡으면서 올림픽 유치 활동은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다. 노 장관의 지휘를 받게 된 올림픽 유치 특별대책반은 즉시 바덴바덴 IOC 총회 기간 동안에 현지에서 활동할 유치대표단의 구성작업에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바덴바덴 IOC 총회 3주일을 앞두고 구성된 유치대표단은 체육관계 인사를 중심으로 재계의 유력인사, 정부관계 인사, 언론인 등 107명의 대규모 인원으로 짜여졌다. 당시 반 연금 상태에 있던 대한체육회 박종규 전 회장은 노 장관의 특별배려로 맨 마지막에야 유치대표단에 끼어 바덴바덴 현지에서 큰 성과를 올리는 주역의 한 사람이 되었다. 유치대표단의 분포는 다음과 같다.

 

▲ 공식대표단 : 박영서 서울특별시장(단장) 외 5명

▲ 올림픽 총회대표 : 김택수 IOC 위원 외 3명

▲ 재계 지원단 :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외 6명

▲ KOC 지원단 : 김세원 KOC 전 부위원장 외 8명

▲ 실무지원단 : 이연택 국무총리실 제1행정 조정관 외 20명

▲ 일반지원단 : 박종규 대한체육회 전 회장 외 15명

 

바덴바덴 IOC 총회 대책의 수립

유치대표단이 서독 바덴바덴으로 출발하기 직전 실무대책반이 최종적으로 점검한 IOC 위원들의 성향을 보면 예상 투표자 82명 중 한국지지 26명, 호의적 고려 6명, 중립 34명, 반대 16명인 것으로 분석되었다. 그때까지 확실한 태도를 밝히지 않고 있던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 출신 IOC 위원들을 어떻게 포섭하느냐에 승패가 갈릴 전망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분석은 다분히 한국 쪽의 희망적인 관측이 작용한 것으로 실상은 훨씬 비관적이었음이 뒤늦게 밝혀진다. 어쨌든 지휘부는 중림적인 IOC 위원들을 집중 공략한다는 방침을 세우고 지역별로 IOC 위원들과 관련 있는 체육계, 정계, 경제계 인사가 각 IOC 위원별로 전담하여 교섭을 벌이는 한편, 홍보전시관의 활용 및 유치제안 연설 등을 통해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교섭 대상자는 직접 투표권을 행사는 IOC 위원 전원과 국제경기연맹 회장단 및 IOC 위원들과 교분이 두텁거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각국 NOC 위원장단, 그밖에 국제스포츠 사회에서 막후 영향력이 있는 인사들을 포함시켰다.

 

서독 바덴바덴의‘10일 작전’

1981년 9월 18일 서울을 떠난 유치대표단이 20일 서독 바덴바덴 시에 도착함으로써 드디어 ‘바덴바덴 10일 작전’의 막이 올랐다. 그러나 유치대표단은 작전0의 출발선부터 암초에 부딪치고 말았다.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그들은 구성원들의 대표 자격을 문제 삼은 논란으로 팀워크가 삐걱거린데다 현지의 압도적인 나고야 우세분위기는 대표단의 활동을 여지없이 위축시켰다.

특히 바덴바덴 시 현지의 언론들은 서울 유치대표단에게 지극히 냉담한 반응을 보이며 서울이 과연 IOC 위원 및 몇 명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느냐가 관심거리라고 논평했으며, IOC 수뇌진도 제24회 올림픽의 나고야 시 개최가 기정사실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는 분위기였다. 그러나 이 같은 현지 분위기는 올림픽 전시관이 개관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9월 22일 오전 바덴바덴 시의 옛 철도역 자리에서 펼쳐진 제24회 올림픽 유치 신청도시들의 전시관 개관식이 예상 밖의 파문을 몰고 왔다. 1988년 여름철 올림픽 개최를 신청한 캘거리(캐나다), 팔룬(스웨덴), 코르티나 탐폐소(이태리) 등 5개 도시가 준비한 전시관이 일제히 문을 열었는데, 서울관의 짜임새 있는 전시내용이 인기를 끌었다.

99㎡정도의 좁은 공간에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의 모형도를 중심으로 한국의 문화나 눈부신 발전상을 패널과 슬라이드가 조화를 이루며 소개하고 있었고, 영상 비디오는 뉴욕이나 도쿄에 손색없는 현대도시인 서울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서울관의 인기를 더욱 높인 것은 영어, 불어, 스페인어에 능한 대한항공 스튜어디스 5명과 미스코리아 출신 안내양 3명이었다. 이들은 우아한 한복 차림으로 서울관을 찾는 인사들에게 정성을 다한 서비스로 안내해 주었다. 반면에 일본의 나고야 관은 사진 위주의 평면적인 전시인데다 일본항공 스튜어디스들이 근무복 차림으로 방문객들을 안내하여 서울관과 여러 모로 비교되었다.

 

KOC 대표단의 활동

유치대표단은 무려 107명이나 되는 대규모였으나 바덴바덴 시에 모인 IOC 위원들과 국제 스포츠 관계자들에 대한 설득작업에 중심적인 구실을 한 것은 역시 체육계 대표들이었다. 조상호 KOC 위원장을 비롯한 전상진 부위원장 및 김운용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박종규 전 KOC 위원장 등은 능란한 외국어 실력과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을 활용하면서 그동안 국제 스포츠 외교 무대에서 쌓아올린 교분을 밑천삼아 정력적인 유치활동을 펼친 끝에 예상 밖의 큰 성과를 올렸다.

일본의 나고야 시측이 전혀 눈치를 체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 이른바 바덴바덴 드라마는 1981년 9월 3일 김운용, 전상진 2인이 선발대로 서울을 떠나면서 그 서막을 열었다. 김 총재는 호신용 스포츠로 범세계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태권도의 대부라는 점을 활용하여 북중미 및 유럽의 네덜란드, 영국, 벨기에를 순방하면서 해외 태권도 사범들의 헌신적인 협조를 받으며 그 지역 IOC 위원들에게 서울올림픽 지지를 호소했다.

70년대 초반에 주 카메룬 대사를 지낸 적이 있는 전상진 부위원장은 케냐, 이집트, 튀니지를 돌고 유럽의 스페인, 포르투갈을 거쳐 바덴바덴을 들어가면서 그 지역 IOC 위원들은 물론 체육계 및 정부 고위인사와 연쇄접촉하고 서울지지를 요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이 올림픽 개최 신청만 해놓고 유치활동이 거의 없어 사실상 유치의사가 불확실한 것으로 믿고 있던 많은 IOC 위원들은 이를 계기로 새삼 서울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 바덴바덴 IOC 총회에 파견되었던 우리 대표단의 귀국. 왼쪽부터 이원경 KOC상임위원, 조상호 KOC위원장, 박영수 서울시장, 정주영 추진위원장, 이원홍 KBC사장.


조상호 KOC 위원장은 바덴바덴 시에 도착한 다음날 저녁 브렌너스파크 호텔로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IOC 위원장을 예방하여 국제정치적 상황 때문에 제24회 올림픽의 서울 개최가 큰 위험부담을 안고 있는 것으로 믿고 있는 IOC 수뇌진의 견해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 9월 25일에는 중동 스포츠계의 실질적인 리더인 쉐이크 파하드 쿠웨이트 NOC 위원장과 요담을 가져 아랍출신 IOC 위원들 사이에 서울지지 세력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었다.

전상진, 김운용 두 사람은 9월 23일 저녁 쿠르하우스에서 열린 서독 대통령 주최 리셉션, 9월 27일 스트라스부르의 관광여행, 9월 28일 바덴바덴 시장 주최 리셉션 등 각종 공식 비공식 행사장을 최대한 활용하여 IOC위원들과 각국 NOC 위원장단 및 국제경기연맹 회장단 등과 접촉하면서 서울지지 세력을 넓히는데 힘썼다.

이 같은 일련의 유치활동 성과는 9월 28일 쿠르하우스에서 전상진 KOC 부위원장이 주최한 스페인어권 대표들을 위한 리셉션에 남미출신 IOC 위원 전원과 포르투갈 IOC 위원 등 50여 명이 참석하는 대성황으로 나타났다.

당시 KOC 부위원장 직을 그만두고 하와이에서 휴가를 즐기다가 정부의 훈령을 받고 바덴바덴 무대에 백의종군했던 김세원 전 KOC 부위원장은 주 노르웨이 대사를 역임한 인연으로 노르웨이 출신 스타우보 IOC 위원과 자주 어울렸다. 그는 특히 친한파인 스타우보 IOC 위원으로부터 북한 측이 서울올림픽을 반대하는 적극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중요한 정보를 얻어내어 유치대표단의 정책수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

 

재벌 총수들의 활동

서울올림픽 유치대표단의 단장은 박영수 서울시장 이었으나 바덴바덴 현지에서 유치단을 이끈 실질적인 주역은 정주영 현대그룹 총수였다. 정부의 올림픽 유치방침이 재확인된 1981년 6월 민간차원의 올림픽 유치활동을 주도하기 우해 구성된 올림픽 유치 준비 위원장에 취임했던 정주영 회장은 전국경제인 연합회 회장으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하여 행정관료, 외교관, 경제인, 체육인 등 이질적인 인사들로 구성된 유치단의 팀워크를 이끄는 주역으로 활약했다. 또한 고급 영어에 능한 유창순 무역협회 회장과 콤비를 이루어 유럽지역 IOC 위원들 사이에 영향력이 큰 영국의 엑세터 IOC 위원과 서독의 바이츠 IOC 위원을 포섭했다.

최원석 대한탁구협회 회장은 스웨덴의 칼 그렌 IOC 위원과 에릭슨 IOC 위원을 서울지지 세력으로 끌어들였고, 프랑스의 두 IOC 위원에 대한 설득 공작을 맡은 조중훈 대한항공 사장은 엘 조그 IOC 위원이 긴 여행에서 돌아와 바덴바덴 도착이 늦어지자 다시 파리로 날아가 직접 모셔오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수단의 할림 IOC위원을 상대로 설득공작을 펼쳤고, 배종열 한양주택사장은 듀니시 출신 IOC 위원을 설득했다.

이처럼 재벌 총수들이 미지의 스포츠 세계에 뛰어 들어 해외에 뿌리내린 자체 기업세력을 활용하는 방법으로 많은 IOC 위원들을 포섭한 것은 ‘바덴바덴 드라마’의 전기를 마련한 일대 성공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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