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4) / 전대호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
  스포츠 경기의 결과는 어느 정도까지만 예측이 가능하다. 만약에 완벽한 예측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 스포츠 복권 회사들은 벌써 씨가 말랐을 것이다. 완벽한 예측법을 터득한 고객들에게 당첨금을 지급하느라 금세 빈털터리가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거꾸로 결과를 예측하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이것 역시 스포츠 복권 사업에는 이롭지 않다. 스포츠 복권이 로또 복권과 다를 바 없게 될 테니 말이다. 스포츠 복권의 흥행은 경기 결과의 부분적 예측 가능성에 의존한다.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적절한 배합! 이것은 스포츠의 재미가 어디에서 나오느냐는 물음을 받고 내놓을 수 있는 대답들 가운데 하나다. 만약 남자탁구 중국의 세계 최강자 마롱과 한국 에이스 이상수가 붙을 경우 반드시 마롱이 이긴다면, 탁구는 건강에는 좋을지 몰라도 승부의 짜릿함과는 거리가 먼 체조쯤으로 전락할 것이다. 대체로 마롱이 이기리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그러나 이상수가 이기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실제로 이긴 적도 있다). 경기 결과를 완벽하게 예측하기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에, 탁구는 선수와 관중 모두에게 짜릿한 재미를 안겨준다.
  넓게 보면, 세상만사의 재미가 다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배합에서 나온다고 할 만하다. 특히 대중을 겨냥한 소설이나 영화는 적당히 전형적이면서(예측 가능하면서) 적당히 특이해야(예측 불가능해야) 한다. 재미의 차원에만 머물 것 없이, 시야를 더 넓혀보자. 예측 가능성과 예측 불가능성의 얽힘은 존재 그 자체의 차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주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둘러보라. 세상은 예측 가능한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으로 이루어졌다. 전자를 필연, 후자를 우연이라고 한다.
 

▲ 완벽한 경기 결과 예측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짜릿한 재미를 안겨준다. 이상수(사진)가 마롱을 이길 수도 있다.

또는 필연과 우연
  예컨대 사람은 죽는다는 것, 시간은 미래를 향해 흐른다는 것, 던져 올린 돌멩이는 땅으로 떨어진다는 것은 필연이다. 반면에 예컨대 필자가 오늘 출근길에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가는 동안 13분 26초 51의 시간이 흐른 것, 당신이 방금 던진 돌멩이가 떨어진 지점에 가보니 하필이면 그 자리에 3년 전 잃어버린 당신의 지갑이 있는 것은 우연이다. 풀숲 꼭대기에 앉은 나비를 잡으려고 잠자리채를 휘둘렀는데 풀숲 속에 숨어있던 여치가 덤으로 잡혔다면, 이것도 우연이다. 이럴 때 우리는 ‘우연히 여치까지 잡았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예리한 독자들, 특히 과학계에 종사하는 독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릴지도 모르겠다. 방금 열거한 우연의 예들은 정말 우연일까? 과연 날카로운 질문이다. 그 예들 역시 필연이라는 주장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애당초 잠자리채의 운동 궤적 안에 들어있던 여치가 잡힌 것은 필연이다. 13분 26초 51의 시간은 필자의 집에서 지하철역까지 거리(L)를 필자의 이동속도(V)로 나누면 나오는 필연적인 값(T=L/V)이다. 당신이 던진 돌멩이의 낙하지점의 GPS좌표와 내 지갑이 놓여있는 지점의 GPS좌표가 같은 것은 7이 7과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필연이다. 이런 관점을 채택하면, 돌멩이가 떨어진 자리에 갔다가 지갑을 발견하더라도 ‘아니, 이런 기막힌 우연이 있나!’라며 경탄할 이유가 전혀 없다. 돌멩이가 떨어진 자리와 지갑의 위치는 일치할 수밖에 없어서 일치한 것이다. 그냥 그럴 뿐이다.
  이런 관점이 낯설고 억지스럽게 느껴지는 분들이 당연히 있을 것이다. 미리 말해두면, 필자는 그런 분들과 대체로 같은 입장이다. 하지만 모든 우연을 필연으로 보는 관점(전문용어로 ‘결정론’)이 아예 터무니없지는 않다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 또 하나의 예로 주사위 던지기를 생각해보자. 상식적으로 주사위 던지기의 결과는 대표적인 우연이다. 1이 나올지, 6이 나올지 예측할 수 없다. 그런데 혹시, 결과는 이미 정해져있는데 우리가 능력이 부족해서 예측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주사위 던지기 결과를 계산해내지 못할 뿐이지, 주사위가 공중에 뜨는 순간, 그 결과는 이런저런 과학 법칙들에 의해서 이미 필연적으로 결정되어있지 않겠느냐 말이다. 충분히 납득할 만한 얘기다. 이 얘기를 쉽게 표현하면 이렇다. ‘네가 뭘 몰라서 우연이라고 착각하는 거지, 알고 보면 필연이야.’
 

▲ 탁구선수들은 ‘우연한’ 득점에는 몸짓으로 미안함을 표현한다. 실없는 예절? 참 멋진 몸짓이다! 독일여자대표 산 샤오나.

결정론적 탁구철학?
  우연과 필연에 대한 논리철학자들의 논의는 엄청나게 섬세하고 전문적이어서 일반인뿐 아니라 웬만한 철학자조차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그러니 다시 발을 빼서, 즐겁고 짜릿한 탁구의 세계로 돌아오자. 탁구를 쳐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듯이, 경기 결과는 우연과 필연의 합작품이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필연적 요소는 선수의 기본실력, 연습량, 당일의 컨디션 등이다. 물론 당일의 컨디션을 우연적 요소로 분류할 수도 있겠는데, 이런 세부사항, 곧 필연과 우연을 가르는 경계선을 어디에 긋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다만, 필연과 우연이 둘 다 승부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승부를 결정짓는 우연적 요소로 어떤 것들을 꼽을 수 있을까? 관중석에 앉은 누군가가 왠지 자꾸 눈에 거슬려 선수의 집중력이 흐트러질 수도 있을 것이다. 선수가 사용하는 러버가 경기장의 온도와 습도에 적합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네트와 에지라는 탁구 특유의 우연적 요소들이 있다. 박빙의 승부에서 나에게 유리한 네트와 에지가 두세 번만 나온다면, 나는 틀림없이 이길 것이다. 심지어 결정적인 승부처에서 나온다면, 단 한 번의 네트가 승부를 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부 독자는 이렇게 반문하고 싶을 것이다. ‘승부를 가르는 네트라면, 그건 실력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고행석의 어느 만화 주인공처럼 네트와 에지를 일으키는 기술을 연마해서 천하를 제패하는 것도 가능하리라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른다. 이런 분들의 생각을 ‘결정론적 탁구철학’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적어도 현역 선수들은 그런 결정론적 탁구철학에 동의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네트와 에지가 실력의 산물이 아니라 우연이라고 인정한다. 그래서 그 우연으로 득점하면 몸짓으로 미안함을 표현한다. 실없는 예절이라고 생각하는 분도 있을지 모르지만, 필자가 보기에는 참 멋진 몸짓이다. ‘이 점수는 내 성취가 아니라 우연의 장난이야!’라는 뜻을 담은 몸짓. 하지만 에지로 얻은 점수도 엄연히 점수다. 대단하지 않은가? 탁구는 우연의 개입을 막지 않는다. 그래서 멋지고 재미있다. (월간탁구 2017년 11월호)
 

▲ 탁구는 우연의 개입을 막지 않는다. 그래서 멋지고 재미있다. 쉬신(중국)의 역동적인 플레이모습.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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