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5) / 전대호

인간-자연 맞섬
  자연과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바람직할까? 이 질문은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 더욱 절실하게 제기되는 듯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가 문화를 일구기 시작할 때부터 등장한 주요 화두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이며 따라서 자연의 일부다. 그러나 인간은 나름대로 의미의 그물을 짜서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문화적 존재이기도 하다. 요컨대 인간은 특이한 정신적 동물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인간은 그냥 자연의 일부로만 머물지 않고, 마치 자기가 자연의 건너편에 자리 잡은 존재라도 되는 듯이, 자기 자신의 자연성(대표적으로 몸)을 포함한 자연 전체를 멀찍이 바라보며 이러쿵저러쿵 서술하고 평가하는가 하면 뚝딱뚝딱 변형하고 개조하기도 한다. 그럴 때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기보다 자연에 맞선 행위자다.
  따지고 보면, 이 글의 첫머리에서 제기한 질문도 ‘인간-자연 맞섬’을 전제한다. 인간이 오롯이 자연이라면, 이 가을의 향기로운 국화나 청명한 하늘의 조각구름이라면, 그 질문은 결코 제기되지 않았을 것이다. 인간이 자연에 맞선 존재라는 생각은 적어도 인류가 문화를 이룬 이래로 우리가 품어온 인간관의 기본요소라고 하겠다.
  물론 필자의 견해에 반발하는 분들도 꽤 있으리라 짐작한다. 이 땅의 전통 사상들은 인간과 자연의 완벽한 조화를 강조하는 나머지, ‘인간-자연 맞섬’이라는 기본 전제를 은폐하는 경향이 있다. <노자>에 나오는 유명한 문구 ‘人法地 地法天 天法道 道法自然(사람은 땅을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는 자연은 본받는다)’에서 사람(人)과 자연(自然)은 매끄럽게 연결된다. 뿐만 아니라 환경파괴와 기후변화가 심각한 문제로 불거진 지금, 많은 사람들은 인간이 자신을 자연에 맞선 존재로 자리매김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느낀다. 그들은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보는 관점을 옹호한다. ‘자연-인간 맞섬’은 이른바 근대철학 또는 서양사상의 어리석은 환상으로 매도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자. 방금 인용한 <노자>의 문구에서도 인간과 자연은 결코 단박에 하나가 아니다. ‘본받는다’는 말 자체가 ‘다르다’를 전제할뿐더러, 사람이 자연에 이르기까지 거쳐야 할 정거장들이 땅, 하늘, 도까지 세 개나 된다. 더구나 사람이 자연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이 문구의 의미라면, 저 문구는 ‘자연과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바람직할까?’라는 우리 질문에 대한 하나의 대답인 셈이다. 이처럼 <노자>도 문화적 인간의 기본조건, 곧 인간-자연 맞섬을 전제한다. 필자가 보기에 이 맞섬은 문화적 인간이 처한 기본조건이다.
  많은 사람들은 환경파괴의 폐해를 지목하면서 이제 자연에 맞선 인간을 버리고 자연 속 인간을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틀림없이 설득력 있는 주장이다. 하지만 ‘자연에 맞선 인간’의 개념은 ‘자유롭게 행위하는 인간’과 직결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우리가 자유로운 행위를 포기하고 자연 속 인간으로서 자연법칙들에 따르기만 하면 파괴된 환경이 회복될까? 그럴 리 없다. 현재 가동 중인 핵발전소들은 그냥 놔두면 꺼지지 않는다. 우리가 주도적으로 행동해야만 꺼진다. 다른 많은 사례에서도 환경 파괴의 수습과 복원을 위해서는 인간의 개입이 필수적이다. 인간이 자연에 맞서 자유롭게 계획하고 노동하고 생산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운명일뿐더러 인간 때문에 파괴된 자연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필자는 믿는다.
 

▲ 환경 파괴의 수습과 복원을 위해서도 인간의 개입은 필수적이다. 관련하여 문득 생각난 영화 <옥자>의 포스터.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스포츠!?
  ‘맞섬’이라는 우리말은 의미의 폭이 참 넓다. 링 위에서 권투선수들이 맞서기도 하고, 탁구대를 사이에 두고 탁구선수들이 맞서기도 하고, 혼례에서 신랑과 신부가 맞절을 위해 맞서기도 한다. 필자가 ‘인간-자연 맞섬’을 이야기할 때, 독자들은 이토록 폭넓은 ‘맞섬’의 의미를 연상하기를 바란다. 중요한 것은 맞선 양편이 동등하다는 점이다.
  우리 시대에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사상은 뭐니 뭐니 해도 자연과학이다. 특히 요새는 진화생물학과 신경과학에 기초한 자연과학적 인간관이 인기를 누린다. 그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호모사피엔스, 잘 발달된 뇌를 가진 동물, 철두철미하게 자연에 속한 존재다. 물론 인간은 대규모 집단을 이룬다든가, 죽은 동료를 땅에 묻는다든가, 복잡한 문자 문화를 개발했다든가 하는 점에서 행태가 특이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에 맞선 존재라는 생각은 터무니없다.
  많은 이들이 이런 자연과학적 인간관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 인간관을 흥미롭게 펼쳐놓은 책인 <사피엔스>(유발 하라리 저)가 이렇게 많이 팔리고 이토록 큰 권위를 얻은 곳이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지 궁금하다. 지금 이 땅의 대세는 자연과학의 틀 안에서 인간을 재구성하기, 곧 ‘인간의 자연화’인 것이 틀림없다. 대중은 인간의 자연화를 마치 자연과학의 확증된 연구 결과인 양 여기고, 일부 지식인들은 자연과학적 인간관을 벗어난 모든 것은 미신이나 허구라고 떠든다. 그러나 필자는 도리어 자연과학적 인간관이 우리를 특정한 방향으로 내모는 이데올로기일 수 있다고 본다. 그 방향으로 나아갈수록 더 희미해지는 것은 자유로운 행위자로서의 인간, 역사를 만들어가는 인간이다.
  철학자 맑스는 유물론자로 유명하다. 실제로 그는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본다. 그럼 그는 자연과학적 인간관의 신봉자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맑스는 ‘인간의 완벽한 자연화’를 이야기하지만 또한 동시에 ‘자연의 완벽한 인간화’도 이야기한다. 자연과 인간 중에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일방적으로 흡수되는 일은 없다. 맑스에 따르면, 인간과 자연이 하나되는 지점, 곧 인간의 자연화와 자연의 인간화가 이루어지는 지점은 다름 아니라 ‘노동’이다. 그런데 필자는 ‘스포츠’도 그런 지점이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스포츠는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맞상대로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러할까? 온 힘을 다해 드라이브를 날리는 탁구선수의 모습을 상상해보라. 그 모습은 인간인가, 자연인가? 이 질문의 답과 뒤이은 이야기는 다음 호를 기대하시라. (월간탁구 2017년 12월호)
 

▲ 스포츠는 인간과 자연이 동등한 맞상대로서 절묘한 조화를 이루는 지점이다. 국가대표 장우진(미래에셋대우)의 경기모습.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글_전대호(시인, 번역가, 철학자)

관련기사

저작권자 © 더 핑퐁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