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벌 열전> 아테네 VS 스파르타

고대 그리스는 지금과 같은 국가의 형태가 아닌 크고 작은 도시 국가(폴리스)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각자 자신들이 속한 도시 국가에 강한 소속감과 자부심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 땅에 사는 사람으로서 다른 도시 국가들과도 연대감을 가지고 외부의 침략에 당당히 맞서는 저력을 보였다. 그러나 정말 무서운 적은 그리스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페르시아 전쟁(BC492~448)의 승리자

페르시아의 최대 전성기 시절은 다리우스1세와 크세르크세스의 재위 시절인 BC 521~466 무렵이었다. 페르시아는 당시 최강의 국가였던 만큼 크고 작은 전쟁을 수없이 치러왔는데 이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두 황제 모두 전력을 쏟았던 상대는 바로 그리스였다. 보통 페르시아 전쟁이라고 부르는 그리스와의 전쟁에서 페르시아가 노린 것은 오리엔트에 이어 그리스마저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페르시아는 그리스 땅을 향한 세 차례의 원정에 나섰다. 하지만 첫 원정은 그리스에 도달하기도 전에 폭풍을 만나 배들이 난파되는 바람에 실패했고, 두 번째 원정은 마라톤 평야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크게 패하며 귀국길에 올라야 했다. 아버지 다리우스1세에 이어 크세르크세스가 세 번째 원정을 나섰지만, 육지에서는 스파르타에 테르모필레에서 크게 상처를 입었고(이는 영화 300의 배경이 된 전투다.) 바다에서는 아테네가 지휘한 그리스 연합군에게 살라미스 해협에서 크게 패해 실패하고 말았다.  

▲ 테르모필레 협곡의 레오니다스 왕과 스파르타 전사들.(루이 다비드)


당시의 그리스는 통일된 지도력 없이 여러 도시 국가가 산재해있는 상태였지만 대제국 페르시아에 맞서 연합군을 구성해 승리를 거두었다. 무적이나 다름없었던 페르시아군으로부터 그리스 본토를 지켜낸 그리스인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작은 도시 국가들이지만 힘을 합치면 대제국 페르시아를 상대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이다. 이에 그동안 페르시아에 굴복했던 그리스의 일부 도시 국가들도 그리스 연합국의 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델로스 동맹 VS 펠로폰네소스 동맹

그리스인들은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강한 군대를 가지고 있는 페르시아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그리스로 쳐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델로스 동맹을 맺었다. 이미 전쟁에서 확인된 단합된 도시 국가들의 힘을 유지하고 싶었던 것이다. 동맹국들은 군선, 군사, 기금 납부 중 하나를 선택해 책임을 다했고 이로서 동맹군을 결성하게 된다. 델로스 동맹의 중심이 된 것은 페르시아 전쟁에서 큰 공헌을 한 아테네였는데 이미 강한 해군력을 자랑하고 있던 아테네는 다른 동맹국들에게 거둬들인 막대한 기금까지 직접 관리하며 그리스의 맹주로 떠오르게 되었다.
 

▲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는 막대한 델로스 동맹의 자금이 없었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사실 델로스 동맹이 생기기 전부터 그리스에는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존재하고 있었다. 스파르타가 이 동맹의 의장국으로서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신들이 찬성하지 않는 안건에는 소집 거부권까지 행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스파르타에 아테네의 독주가 곱게 보일 리 없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없었더라면 승리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큰 활약을 했음에도 아테네가 스포트라이트를 독차지했던 것도 거슬리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BC431∼404), 화염 속의 그리스 

아테네는 계속해서 군사력을 키워가며 델로스 동맹국의 수를 늘려갔다. 공금이라 할 수 있는 델로스 동맹 기금을 마음대로 사용하며 자신들의 세를 늘려가는 아테네의 횡포에 일부 도시국가들이 동맹을 탈퇴하려고도 했지만, 아테네는 이마저도 무력으로 진압해버렸다. 독주하는 아테네에 위협을 느낀 도시 국가들은 아테네에 대한 반발로 펠로폰네소스 동맹에 가입하기도 했고 결국 이러한 상황에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와의 전쟁을 결의하게 되었다. 주로 항구, 해양에 기반을 둔 델로스 동맹과 육지에 기반을 둔 펠로폰네소스 동맹에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거의 포함되어있었으니 그리스 땅 전역이 전쟁에 휩싸이게 된 셈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중간에 약 10여 년간의 냉전 기간이 있기는 했지만 27년이나 이어졌다. 초창기에는 최정예의 육군을 가지고 있는 스파르타와 육지에서의 정면충돌을 피하고 강한 해군력을 기반으로 바다에서 기선을 잡으려 한 아테네가 유리한 듯했지만 아테네에 전염병이 돌면서 많은 사람이 죽고 지도자인 페리클레스마저 병사하고 만다. 이후 약 10년간 냉전 기간을 갖게 되지만 아테네가 스파르타를 지원하던 시칠리아의 시라쿠사 원정을 시도하면서 다시 화약고엔 불이 붙었다. 결국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힘까지 끌어들이면서 BC 404년 4월,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냈고 도시의 성벽을 모두 파괴하도록 했다. 그리고 이로써 델로스 동맹은 완전히 해산되었다.


영광을 뒤로하고 자멸의 길로 들어서다

이제 그리스의 주도권은 스파르타의 손에 들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생각보다 컸다. 정치, 건축, 문화, 예술 등 전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보이던 그리스가 전체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한 것이다. 패자인 아테네의 인구는 절반으로 줄어들었고 승자인 스파르타 역시 큰 타격을 받았다. 승자로서 새롭게 흡수한 지역을 관리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군사력과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를 다른 도시 국가들에 상납받는 과정에서 많은 갈등이 야기되면서 내부적 위기까지 불러오고 말았다. 전쟁에 참여했던 다른 도시 국가들의 사정은 더 나빴다. 국력이 줄고 인구가 줄어드는 것으로 모자라 내란까지 계속되면서 멜로스, 스키오네, 토로네, 프라타이아이 등의 도시 국가들은 아예 멸망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때 25만 명의 페르시아군를 물리쳤던 그리스는 변방에 불과했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이끌고 온 4만 명의 군사에게 주도권을 넘겨주고 만다. 촌뜨기나 다름없었던 알렉산더의 눈에 그리스의 발전된 도시 국가들은 눈부시게 보였겠지만 이미 그것은 지나간 영광이었다. 이미 인류사에서 차지했던 그리스라는 이름의 패자는 영영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월간탁구 2019년 5월호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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