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7) / 전대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바둑선수 알파고?
 
알파고와 이세돌의 역사적 대결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관점에서 발언했다. 대개 핵심 내용은 코앞에 다가온 인공지능의 시대를 우려하거나 환영하는 것이었다. 그런 대세와 조금은 다르게 필자는 다시금 ‘몸’을 화두로 붙들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연재를 시작할 때 필자는 스포츠의 두 기둥을 ‘몸과 승부’로 보고 그중에서도 ‘승부’가 스포츠의 본질이라고 말했다(2015년 12월호). 몸을 중시할 필요가 없는 스포츠 종목들로 바둑과 컴퓨터게임(이른바 ‘e스포츠’)을 꼽으면서 말이다. 그러나 역시 세상일은 닥쳐봐야 아는 법. 정말로 몸이 없는 알파고라는 녀석이 기막힌 바둑 솜씨로 9단 중의 9단 이세돌을 내리 세 판 굴복시키는 것을 실제로 보노라니 그야말로 황망했다. 웬 괴상망측한 녀석이 나타나 바둑의 세계를 황폐화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오는 것을 간신히 참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필자가 ‘스포츠의 본질’을 다룬 이전 칼럼에서 중대한 실수를 하나 범했음을 깨달았다.
  몸을 배제하고 오직 승부에 스포츠의 본질이 있다면 필자는 알파고의 승리에 아무 불만이 없어야 마땅하다. 오히려 몸이 있어서 대국 중에 한두 번 화장실에 다녀와야 하는 이세돌이 바둑 선수로서 결함을 지닌 것이라고 평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배설하지 않을 뿐더러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는 알파고를 보라! 그것이 가장 완벽한 바둑 선수의 모습이다!’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필자는 도저히 알파고를 이상적인 바둑 선수로 인정할 수 없다. 왜 그럴까? 이 질문에 답하는 작업은 필자가 저지른 실수를 반성하고 수정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필자는 ‘감정’이라는 매우 중요한 요소를 등한시하는 실수를 범했다. 몸이 없는 스포츠는 상상할 수 있고, 현실에도-알파고에서 보듯이-어떤 의미에서 이미 있지만, 감정이 없는 스포츠는 어떨까? 이런 스포츠는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이 필자의 일관된 입장이다. 다만, 이전에 필자는 몸과 감정이 뗄 수 없게 얽혀있다는 사실을 눈여겨보지 않았다. 별다른 숙고 없이 어떤 스포츠에서든 선수들은 몸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전제했던 것이다. 알파고는 이 전제가 틀렸음을 보여줬다.
 

▲ 모든 스포츠 선수가 몸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라는 전제는 알파고에 의해 깨졌다. 바둑TV 캡쳐화면.

스포츠는 감정의 향연이다
 
몸과 감정의 연결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기쁨, 슬픔, 감격, 조바심, 절망, 공격성 따위는 과연 몸과 뗄 수 없게 연결되어있을까? 이것은 무척 까다로운 질문이어서 제대로 대답하려면 생물학, 뇌 과학, 심리학, 철학을 다 동원해야 한다. 그러니 간략하게 이것만 밝혀두려 한다. 많은 과학자와 철학자는 감정emotion을 아예 신체반응으로 정의한다. 즉, 가장 일반적인 층위에서 감정을 흥분과 안정으로 나눈다면, 흥분이란 심장 박동이 빠르고, 입안에 침이 마르고, 동공이 확대되고, 피 속의 스트레스호르몬 수치가 높은 상태를 뜻한다. 또한 그 반대의 상태가 바로 안정이라는 감정이다.
  이 정의가 옳다면, 몸이 없는 존재는 감정을 가질 수 없다. 그런 존재가 스포츠 선수일 수 있을까? 감정이 없다는 것은 결정적인 결격 사유라고 봐야 한다. 왜냐하면 다시 생각해보니 본질적으로 스포츠란 승리의 기쁨과 패배의 쓰라림, 승부수를 둘 때의 결연함과 조바심, 도저히 승부를 뒤집을 수 없다는 판단이 설 때의 절망감, 탁구공이 부서져라 스매싱을 내리꽂을 때의 공격성 같은 감정들의 향연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몸이 없는 스포츠를 거론할 때 염두에 둔 것은 아무튼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선수로 나선 승부에 국한됐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는 것을 알파고가 일깨워줬다. 알파고는 몸과 감정이 없는 바둑 선수다. 그러므로 엄밀히 따지면 알파고는 아예 바둑 선수가 아니다. 생각해보라, 알파고와 이세돌의 다섯 판 대국이 스포츠였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감정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있었다. 이세돌의 감정과 그 바둑을 지켜보는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이 넘치도록 있었다. 그러나 알파고에게는 없었다. 예컨대 그는 자신의 승리를 기뻐했을까? 쉬지 않고 학습한 덕분에 거둔 성과에 감격했을까? 넷째 판에서 이세돌에게 역전 당해 돌을 던질 때, 알파고는 부끄러움이나 분함을 느꼈을까? 천부당만부당하다.
  알파고는 그저 바둑을 두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감정들을 느낄 리 없다. 넷째 판에서 이세돌의 결정적인 한수 이후 알파고가 잠시 이해하기 어려운 행마를 했을 때 어떤 해설자는 ‘알파고가 당황했다’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하지만 그때 알파고는 정말로 당황했을까?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그 ‘당황’은 알파고에서 발생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알파고에 이입한 감정이었다. 우리의 감정이입이 알파고를 바둑 선수로 만들었고, 그와 이세돌이 벌인 그 역사적 대결을 ‘스포츠’로 간주하게 했다.
 

▲ 로봇이 스포츠를 할 수 있는 시대가 과연 올까? 사진은 로봇 권투선수의 경기를 그린 SF영화 [Real Steel]의 한 장면.

사람다움? 안 해도 되는 활동을 한다는 것!
  로봇 탁구선수가 마롱 수준의 인간 최고수를 이기려면 앞으로 얼마나 세월이 흘러야 할까? 확언할 수는 없겠지만, 21세기 안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생각이다. 기계에게는 하찮은 계산 문제를 인간은 쩔쩔매면서 푼다. 거꾸로 인간에게는 그야말로 식은 죽 먹기인 여러 몸동작을 기계는 여태 어설프게 흉내 내는 수준이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인간의 뇌는 무엇보다도 먼저 몸을 통제하는 일을 담당하기 위해 진화한 기관이고, 계산 기계인 컴퓨터는 닥치고 계산하기 위해 제작된 도구니까 말이다. 컴퓨터는 그렇게 제작되어 그렇게 계산만 한다. 반면에 인간의 뇌는 궁극적으로 생존과 번식을 위해 진화한 기관인데도 불구하고 시키지 않은 짓들을 한다. 바둑을 두고, 탁구를 하고, 암벽을 타고, 시를 쓴다. 안 해도 되는 활동을 한다는 것, 이것이 그 무엇보다 고귀한 사람다움의 핵심이다.
  컴퓨터의 계산 능력이 계속 발전하면, 언젠가 인간 최고수를 이기는 로봇 탁구선수가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가능성이 실현되더라도, ‘감정’의 문제는 여전히 남을 것이다. 마롱을 이기고 나서 유순복처럼 깡충깡충 뛰며 환희의 몸짓을 하는 로봇이 있다고 해보자. 우리는 그 환희를 인정하고 공감해야 할까? 만약 그 로봇이 원래 지리 측량, 해저 탐사, 광산 개발 따위를 위해 제작된 녀석인데 어느 순간 탁구에 맛을 들여 제 본분을 잊고 훈련에 매진한 끝에 승리를 따낸 거라면, 필자는 기꺼이 그의 환희를 인정하고 공감하겠다. 그렇게 안 해도 되는(심지어 하지 말라는) 활동에 열중할 줄 아는 로봇이라면 우리와 동등한 인격체로 간주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그러나 문제는 간단하지 않다. 수많은 SF영화들에서 보듯이, 빠르게 다가오고 있는 인공지능 시대에 대한 우려는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예상 밖의 행동을 하는 로봇에 대한 막연한 공포에서 출발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그런 로봇은 한마디로 고장 난 기계다. 그런데 얄궂게도 로봇이 진정한 의미에서 스포츠에 참여하려면 그런 오작동이 필수조건인 듯하다. 먼 미래에 어느 광산 개발용 로봇이 시키지도 않은 탁구에 열중한다면, 우리는 그의 고유한 감정과 삶을 인정하고 격려해야 할까, 아니면 그를 고장 난 기계로 판정하고 폐기해야 할까? 지금 많은 철학자들은 이런 까다로운 질문들이 현실의 문제로 닥칠 날을 설레는 마음으로 내다보고 있다. (월간탁구 2016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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