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우 낯설었던 ‘혁신’ 얼마 전 막을 내린 2018년 러시아 월드컵에서 가장 눈에 띄는 혁신은 VAR, 곧 ‘비디오 보조 심판(Video Assistant Referee)’의 도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글의 목적은 그 혁신을 철학적으로 성찰해보는 것이다. 늦은 밤에 무척 긴장하면서 축구경기를 시청한 분들이 꽤 많을 것이다. 필자도 그랬다. 우리나라 팀이 스웨덴과 맞선 첫 경기. 비록 우리 팀의 실력이 미덥지는 않았지만, 축구라는 경기는 기본적으로 단체전이어서 그런지 수많은 관중과 시청자를 하나로 통합하는 힘이 늘 강력하다. 더구나
탁구는 정치적 스포츠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숱한 명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를 꼽으라면, 필자는 이 문장을 대겠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 그리고 탁구철학 칼럼을 쓰는 사람답게 “탁구는 정치적 스포츠다.”라는 문장을 덧붙이겠다. 물론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문장이 아니라 필자의 창작이다. 벌써 많은 분이 고개를 끄덕이리라 예상하지만, 탁구가 정치적 스포츠라는 것은 역사를 통해 공인된 사실이다. 그 유명한 ‘핑퐁외교’를 생각해보라. 1971년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중국과 미국이 참가했다. 대회가 끝난
반드시 승부가 필요하다 인간의 활동 분야들은 다양하며 제각각 고유한 특색이 있지만, 어느 분야든 건강하게 작동하려면 반드시 승부가 필요하다. 이때 승부의 명료한 예는 스포츠에서의 시합, 곧 겨루기다. 겨루기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인간의 활동은 꽤 다른 방향으로 진화하는 경향이 있다. 스포츠 이외의 활동들, 예컨대 정치, 경제, 학문, 예술에 겨루기가 있는지 여부를 따지는 것은 얼핏 이상하게 느껴진다. 이 분야들에는 탁구 시합처럼 양편이 맞서 승부를 가르는 대결이 딱히 존재하지 않는 듯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우리가 스포츠에 매료되는 이유 다무라 료코(결혼 후 성이 ‘다니’로 바뀜)라는 일본 여자 유도선수가 있었다. 1975년생인데, 격년으로 열리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1993년부터 2003년까지 6회 연속 금메달, 그 후 아이를 낳고 복귀한 2007년 대회에서도 금메달을 땄다. 2000년과 2004년의 올림픽 금메달도 그의 차지였다. 유도 교과서에 나오는 모든 기술을 가장 완벽하게 구사했다는, 그야말로 전설적인 선수다. 그런 다무라가 한창 팔팔하던 1996년, 미국 애틀랜타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당시 다무라는 국제대회 84연승을 달리던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 ‘호모 하빌리스’ ‘호모 하빌리스 Homo habilis.’ 대략 200만 년 전에 살았던 인간 조상의 명칭이다. 정확한 뜻은 ‘손재주를 가진 인간’이지만, 흔히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이라는 설명이 더 널리 알려져 있다. 농사꾼을 보나 광부를 보나, 손을 놀리는 것은 도구를 사용하는 것과 뗄 수 없는 관계이니 퍽 적절한 설명이라고 하겠다. 물론 동물계 전체에서 오직 인간과 그 직계 조상에서만 도구의 사용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해달은 배영 자세로 배 위에 돌을 올려놓고 거기에 조개를 짓찧어서 속살을 빼먹고,
몸의 경보 시스템을 꺼버리는 약물들 3주 동안 프랑스 전역을 도는 자전거 경주 ‘투르 드 프랑스’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다지 인기가 없지만 유럽에서는 대단한 스포츠 행사다. 한동안 독일에 있을 때 필자는 그 경주에 상당히 매료됐었다. 결승선 통과 3-4분 전부터 갑자기 시작되는 폭풍 질주의 짜릿함을 생생히 기억한다. 1967년 투르 드 프랑스에서 벌어진 일이다. 산악구간 오르막에서 당대 최고의 영국 선수 톰 심슨Tom Simpson이 넘어진다. 진행요원들이 달려오자 그는 “나를 일으켜 주세요.”라며 도움을 청한다. 다시 자전거에 오른
정말 큰 산은 높지 않게 보인다 정말 큰 산은 높지 않게 보인다. 아버지가 아들을 데리고 동네 뒷산에 올라 멀리 남쪽을 가리키며 저기 저 조그만 세모꼴 봉우리가 지리산 천왕봉이라고, 저기가 한반도 남쪽 절반에서 제일 높다고 일러주면, 아들은 고개를 갸웃거리기 십상이다. 아들이 보는 광경 속에는 가까운 봉우리들, 두드러지게 솟은 봉우리들이 숱하게 널렸다. 그런데 저 맨 끝의 봉우리, 아버지가 거듭 설명해준 덕에 간신히 알아본 저 보일락 말락 하는 봉우리가 제일 높다고? 민주적인 부자 관계라면, 아들은 필시 수긍할 수 없다며 반발할 테
자연(自然), 저절로 그러한 이 한방으로 끝장을 보기로 작심하고 온 힘을 다해 드라이브를 후려치는 탁구선수를 상상해보라. 그 모습은 자연의 모습인가, 아니면 인간의 모습인가? 똑같이 자연을 이야기해도, 마음속에 품은 이미지는 다양할 수 있다. 필자가 어렸을 때 이발소들에는 거의 예외 없이 싸구려 풍경화가 걸려있었다. 산과 숲과 시내 따위가 나오는 풍경화. 이발소 주인들은 그런 풍경이 고객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사실을 틀림없이 알았을 것이다. 짐작하건대 자연의 포근함을 상상하는 사람의 대다수가 그런 풍경을 떠올리지 싶다. 그 이미지에서
인간-자연 맞섬 자연과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맺어야 바람직할까? 이 질문은 산업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에 더욱 절실하게 제기되는 듯하지만, 거슬러 올라가면 인류가 문화를 일구기 시작할 때부터 등장한 주요 화두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동물이며 따라서 자연의 일부다. 그러나 인간은 나름대로 의미의 그물을 짜서 세계를 이해하고 자기 자신을 이해하는 문화적 존재이기도 하다. 요컨대 인간은 특이한 정신적 동물이다. 이런 독특함 때문에 인간은 그냥 자연의 일부로만 머물지 않고, 마치 자기가 자연의 건너편에 자리 잡은 존재라도 되는 듯이, 자기 자신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 스포츠 경기의 결과는 어느 정도까지만 예측이 가능하다. 만약에 완벽한 예측이 가능하다면, 전 세계 스포츠 복권 회사들은 벌써 씨가 말랐을 것이다. 완벽한 예측법을 터득한 고객들에게 당첨금을 지급하느라 금세 빈털터리가 되었을 테니까 말이다. 거꾸로 결과를 예측하기가 아예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이것 역시 스포츠 복권 사업에는 이롭지 않다. 스포츠 복권이 로또 복권과 다를 바 없게 될 테니 말이다. 스포츠 복권의 흥행은 경기 결과의 부분적 예측 가능성에 의존한다. 예측 가능성과 불가능성의 적절한 배합! 이것은 스포
익스트림 스포츠스포츠란 무엇일까? 필자는 이 지면을 통해서 나름의 대답을 제시해왔다. 이를테면 스포츠 이론을 구성해본 셈인데, 그 이론을 구성하는 주요 개념들은 승부, 몸, 놀이, 싸움 등이었다. 더 나아가 ‘사람은 사람을 상대하기 마련’이라는 원리도 언급한 바 있다. 이 원리에는 스포츠란 인간이 인간을 상대로 삼아서 하는 활동이라는 뜻이 담겼다. 우리의 소재이자 큰 틀에서의 주제로 삼고 있는 ‘탁구’에 적용해 봐도 꽤 적절한 이론이지 싶다. 탁구는 사람이 사람을 상대로 하는 놀이이자 싸움이요, 몸으로 가르는 승부니까 말이다.그러나
황소의 샅바를 잡는 기분씨름선수 출신 방송인 강호동이 이른바 ‘소년장사’ 시절 전설의 이만기와 처음 맞붙었던 경험을 어느 프로그램에선가 들려주었다. 워낙 입담이 좋은 사람이니, 온갖 과장과 허구를 듬뿍 가미하여 장풍과 괴력이 난무하는 무용담을 늘어놓았으리라 짐작하는 이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방송인이 된 강호동은 그때가 눈앞에 선한 듯 이렇게 고백했다. “저쪽에서 이만기 선수가 올라오는데, 이건 뭐, 600킬로그램짜리 황소가 올라오는 것 같아요.”알다시피 이만기는 원래 한라급이었다가 체급을 올린 선수여서 백두급 씨름판에서
군대문화의 그림자어느 대학 캠퍼스에서 본 광경이다. 남녀 학생들이 4열종대로 교내 도로를 달린다. 체격을 보아하니 다들 체육대학생인 것이 분명하다. 대열의 오른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아마도 과대표나 동아리 회장인 듯한 학생이 구령을 붙인다. “하나! 둘! 셋! 넷!” 일사불란함을 위한 지시도 빼놓지 않는다. “발 맞춰, 발! 왼발! 왼발!” 어느새 저만치 앞서간 대열에서 “와!” 하는 함성이 요란하게 들려온다. 우두머리의 지시가 있었던 모양이다. 대학생들은 평범한 트레이닝복을 입었지만, 어쩔 수 없이 군대를 연상하게 된다. 아직
심신일원론과 심신이원론철학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중대한 화두로 ‘심신문제’라는 것이 있다. 핵심 질문들은 이러하다. 정신과 물질은 별개일까? 별개라면 양자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시야를 좁혀서 인간에 초점을 맞추면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 몸과 마음은 별개일까? 별개라면 양자는 어떻게 관계를 맺을까? 실제로 이 문제는 정신과 물질에 관한 존재론적 문제지만, ‘심신문제’라는 명칭에서 보듯이, 문제가 첨예하게 불거지는 자리는 우리 인간이다. 몸과 마음이 서로 어떤 관계냐 하는 것이 가장 뜨거운 쟁점이다.심신문제가 중대한 화두로 떠
밤이 낮으로, 낮이 밤으로 뒤집히는 기적강한 공격은 항상 효과적일까? 만약에 그렇다면 스포츠의 묘미는 반의반토막 이상으로 떨어져버릴 것이다. 맞선 상대가 서로의 몸무게를 겨루는 스포츠를 상상해보자. 그 스포츠에서 관객은 ‘보기보다 더 무겁네!’라는 희한한 경우가 발생할 때만 재미를 느낄 것이다. 두 거구가 양팔저울 위에 올라선다. 양팔저울이 한쪽으로 기운다. 그것으로 끝이다. 더 무거워서 아래로 내려온 선수가 이긴다. 정육점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겠지만, 스포츠로서는 터무니없다.권투에서 강한 스트레이트, 야구에서 빠른 공, 탁구에서
수단? 항상 또한 목적으로 대하라!철학자 칸트를 대표하는 문장으로 사람들은 흔히 ‘인간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하라.’는 말을 꼽는다. 한 편으로 백번 옳은 말이지만, 속세를 헤쳐 가는 생활인의 귀에는 순진한 도덕군자의 비현실적인 훈화말씀처럼 들리기도 한다.우리의 생계가 걸린 시장을 생각해보라. 인간이냐 동물이냐 물건이냐를 막론하고 무릇 존재는 일단 시장에 나오면 상품의 성격, 곧 이윤 취득을 위한 수단의 성격을 띠기 마련이다. 어디 그뿐이랴, 연극에 출연하는 배우들도 상당한 정도로 수단이다. 아무리 주연배우라도, 심지어 연출가
전체로서 행동하는 자만이 자유롭다! 요새 우리 주변의 교양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서양 근대철학자를 꼽으라면, 아마도 스피노자를 꼽아야 하지 싶다. 그 증거로 이라는 책을 들 수 있다. 곳곳에서 자주 눈에 띄는 대중 철학자 강신주가 쓴 그 베스트셀러는 줄곧 스피노자의 문장들을 인용한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주요 내용은 일종의 마음 다스리기를 위한 지침이다. 실제로 스피노자는 그런 심리상담가의 면모를 지닌 철학자이고, 그 면모가 오늘날 국내외에서 그가 누리는 인기의 주요 원인인 것도 사실이다
천국은 가능할까? 대결은 필연일까? 너무 추상적이고 짤막한 듯하니, 다시 묻자. 우리 인간은 언제 어디에서나 서로 맞서 드잡이하는 것을 피할 수 없을까? 필자는 어릴 적에 교회에 다녔는데, 그때 부르던 노래들 중 하나에 이런 가사가 있었다. “사자들이 어린 양과 뛰놀며 장난 쳐도 다치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일단 노래니까 즐겨 부르면서도 약간 미심쩍었다. 참 사랑과 기쁨의 나라야 물론 환영하지만, 사자가 어린 양과 뛰논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지 같았다. 그런 사자는 뭘 먹고 살지? 모세가 이
코치도 관중도 스포츠의 주체 스포츠의 주체는 누구일까? 당연히 가장 먼저 선수를 꼽아야 한다. 탁구대를 중간에 놓고 맞서 승부를 겨루는 두 선수가 스포츠를 한다. 그러나 스포츠의 주체를 선수로만 한정할 수 없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네트 옆에 엄숙히 앉아있는 심판을 생각해보라. 그는 경기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엄연한 스포츠의 주체다. 더 나아가 탁구경기장 곁 벤치에 앉아 손에 땀을 쥐는 코치와 동료 선수들은 어떠한가. 팀 동료들이야 선수의 멋진 플레이에 물개 박수를 치고 가끔 ‘화이팅’을 외쳐
인간은 유난히 공놀이를 즐긴다 스포츠 종목들을 나열해보면 금세 알 수 있듯이, 인간이라는 동물은 유난히 공놀이를 즐긴다. 물론 고양이와 개도 공놀이 비슷한 것을 종종 하지만, 인간의 공놀이 사랑은 그 정도 행태와 차원이 다르다. 따지고 보면 고양이와 개의 공놀이도 인간이 전수해준 것으로 보는 편이 합당하다. 서커스와 쇼에 나오는 코끼리, 물개, 펭귄, 돌고래의 공놀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도대체 왜 인간은 공놀이를 이토록 좋아할까? 이 어려운 질문에 접근하기 위해 연습문제를 풀어보자. 역시 만만치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조금 더 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