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Sophy | 탁구와 철학(22) / 전대호

황소의 샅바를 잡는 기분

씨름선수 출신 방송인 강호동이 이른바 ‘소년장사’ 시절 전설의 이만기와 처음 맞붙었던 경험을 어느 프로그램에선가 들려주었다. 워낙 입담이 좋은 사람이니, 온갖 과장과 허구를 듬뿍 가미하여 장풍과 괴력이 난무하는 무용담을 늘어놓았으리라 짐작하는 이도 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방송인이 된 강호동은 그때가 눈앞에 선한 듯 이렇게 고백했다. “저쪽에서 이만기 선수가 올라오는데, 이건 뭐, 600킬로그램짜리 황소가 올라오는 것 같아요.”

알다시피 이만기는 원래 한라급이었다가 체급을 올린 선수여서 백두급 씨름판에서는 덩치가 작은 편이었다. 반면에 강호동은 프로 씨름판에서 처음부터 백두급이었다. 짐작하건대, 강호동이 회상하는 그 첫 대결에서도 이만기는 강호동보다 몸무게가 10킬로그램 이상 적었을 테다. 그런 이만기가 강호동의 눈에는 황소로 보였던 것이다. 황소와 씨름해서 이길 사람은 없다. 풋내기 프로 강호동은 씨름판에 오르는 순간부터 심리적으로 무너져 있었던 셈이다. 즉,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필시 그 대결에서 강호동은 졌을 것이다. 선수 당사자가 질 것이라고 예상한 경기는 천지개벽에 준하는 행운이 없는 한 패배로 끝나기 마련이다.

황소의 샅바를 잡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필자가 아는 아마추어 유도인은 국가대표급 고수의 깃을 잡았던 경험을 이렇게 표현했다. “바위를 잡은 것 같았어.” 과연 그가 상대한 선수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바위 같은 실력자였을까? 물론 그 유도인은 그렇다고 몇 번을 강조했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그 유도인은 그 정도 수준의 선수를 처음 만났을 것이고, 따라서 늘 통하던 흔들기가 통하지 않자 덜컥 당황했을 것이다. 그 다음부터는 누구나 아는 얘기다. 내가 움켜잡은 것은 유도복의 깃이 아니라 거대한 곰의 털가죽으로 느껴지고, 상대의 숨소리는 야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로 들린다. 나는 몸무게가 증발하여 유도복을 씌운 풍선 같고, 상대는 유도복을 걸친 바위 같다.
 

▲ 세계탁구 최강자 마롱. 이 선수도 은퇴한 왕하오에게는 맥을 못 췄다. 사진은 왕하오 은퇴 이후 첫 세계정상에 오르던 때의 모습이다. 월간탁구DB.

‘천적’을 만드는 ‘주눅’의 힘

특히 격투기가 그렇지만,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심리적 위축, 곧 주눅은 승부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주눅 들면, 형편없이 진다. 이른바 천적관계라는 것도 상당한 정도로 주눅에 그 원인이 있다. 객관적으로 평가하면 대등하거나 오히려 우수한 A선수가 유난히 B선수만 만나면 맥을 못 추고 질 때, 우리는 B가 A의 ‘천적’이라고 말한다. 탁구에서도 은퇴한 왕하오가 마롱의 천적으로 유명했다. 마롱은 사실상 천하제일로 등극한 뒤에도 전성기를 지난 왕하오에게 자주 졌다. 그것도 벼르고 벼른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듭 졌으니, 이루 말할 수 없이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왜 마롱은 유독 왕하오에게 약했을까? 여러 측면에서 대답에 접근할 수 있겠지만, 필자는 심리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싶다. 어쩌면 마롱은 경력 초기에 전성기의 왕하오에게 대패한 적이 있을 것이다. 그 처참한 패배의 충격으로 마롱의 기억 속에 왕하오는 넘을 수 없는 벽으로 각인됐고, 이 심리적 주눅은 마롱이 천하 제패를 준비하던 시절에도 그대로 남아 왕하오와 대결할 때마다 마롱의 팔다리를 옭아맸다. 물론 이것은 필자의 추측일 뿐이지만, 실제로 마롱은 왕하오가 은퇴한 뒤에야 처음으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다.

대패의 충격과 뒤이은 주눅의 효과는 격투기에서 더 극적이다. 권투에서 KO로 크게 진 선수가 나중에 복수에 성공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복수전 기회가 오더라도 시합을 기피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아니, ‘동물지상정’이라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다. 격투에서 일방적으로 맞은 기억은 강렬하고 완고하고 동물적이다. 세월이 꽤 지나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합리적인 생각으로 아무리 잠재우려해도 불쑥불쑥 튀어나온다. 왜냐하면 그 기억은 공포와 얽혀있기 때문이다.

우리 뇌에서 공포에 관여하는 주요 부분은 편도체인데, 이 부분은 독재자처럼 구는 경향이 있다. 합리적인 앞이마엽이 아무리 자제를 요청해도, 일단 활성화된 편도체는 생명의 위협이 닥치기라도 한 것처럼 뇌의 나머지 부분과 몸 전체에 비상경보를 발령하여 공포반응들을 일으킨다. 처참한 패배의 기억을 가진 선수의 편도체는 링 근처에만 가도 격하게 활성화할 수 있다. 그러면 선수는 다리가 후들거리고 어깨가 오그라든다. 그런 선수는 절대로 링에 오르려하지 않겠지만, 혹시라도 그를 설득하고 강제하여 링에 올리는 것은 심리적 살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권투선수를 육성할 때는 적당한 상대와의 대결을 주선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 예컨대 겨우 5전 정도를 뛴 선수를 한국챔피언과 대결시키는 것은 선수로서의 생명을 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실력 차이가 월등히 나는 상대를 만나 호되게 맞은 권투선수는 대개 링을 떠난다. 주눅의 힘은 이 정도로 강력하다.
 

▲ 누구와 만나든 어차피 ‘붙으면 한 짐’이다. 주눅 들지 말고 싸워라! 사진은 아산에서 열렸던 2017 아시아주니어선수권대회에 출전했던 한국탁구 유망주들의 모습. 월간탁구DB.

누가 누구와 붙든 사람과 사람의 대결

탁구 시합에서 동물적인 공포와 맞닥뜨리는 일은 아마 없을 테니, 탁구선수가 드는 주눅은 권투선수가 드는 주눅과는 다른 방식으로 설명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탁구선수의 주눅도 합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천적관계를 발생시키기에 충분할 만큼 강하리라는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패배는 어떤 형태든지 쓰라리기 마련이고, 그 쓰라림(부정적인 감정)의 기억은 편도체에 각인된다. 적당한 계기가 주어지면 그 기억은 주눅의 형태로 발현할 테고 말이다. 심지어 주눅은 ‘전통’처럼 이어지기도 하니 선배의 지독한 패배가 후배들에게 이어져 한 번도 싸워보지 않은 상대에게 이미 지고 시작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오성홍기가 새겨진 붉은 유니폼을 입은 선수를 상대하는 전 세계 탁구선수들을 생각해보라.

주눅은 스포츠를 벗어난 일상에서도 나타난다. 필자는 수학공식 앞에서 주눅 드는 문학도와 철학도를 숱하게 보았다. 아마도 그들이 중‧고등학교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에서 비롯된 주눅일 것이다. 조금만 공부하면 전혀 어렵지 않은데, 그들은 한사코 손사래를 치며 꽁무니를 뺀다.

태권도를 할 때 들은 좋은 말 중 하나로 ‘붙으면 한 짐’이라는 것이 있다. 누구든지 작심하고 덤벼들면 만만하게 상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당신이 어떤 이유에서든 주눅 들었을 때, 상대도 나름의 이유에서 주눅 들었을지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 스텝이 좀 가벼워지지 않을까? 누가 누구와 붙든, 사람과 사람의 대결, 한 짐과 한 짐의 대결이다. (월간탁구 2017년 9월호)

스포츠는 몸으로 풀어내는 철학이다. 생각의 힘이 강한 사람일수록 보다 침착한 경기운영을 하게 마련이다. 숨 막히는 스피드와 천변만화의 스핀이 뒤섞이는 랠리를 감당해야 하는 탁구선수들 역시 찰나의 순간마다 엄습하는 수많은 생각들과도 싸우지 않으면 안 된다. 상극에 있는 것 같지만 스포츠와 철학의 접점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철학자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는 스포츠, 그리고 탁구이야기. 어렵지 않다. ‘생각의 힘’을 키워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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